5월의 어느 토요일, 답답하고 무료한 도심지를 벗어나 생명의 도시 화천으로 떠난다.
화천읍에서 해산령까지는 약 20km 거리다. 한적한 지방도를 따라 평지와 오르막을 30분쯤 달리면 터널이 하나 나타난다. 남한 최북단,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해산터널이다. 길이 1,986m인 해산터널은 직선으로 쭉 뻗어 있다. 그래서 터널 안에 들어서면 저만치 앞에 바늘구멍처럼 출구가 보인다. 터널 출구가 비수구미길 들머리인 휴게소다.
화천의 여름은 해산령과 비수구미 계곡에 가장 먼저 찾아든다. 화천읍에서 평화의 댐으로 이어지는 460번 지방도를 타면 해산령 아흔아홉 굽이를 푸르른 초록으로 물들인 신록의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인적도, 오가는 차량도 드문 구절양장의 고갯길을 오르내리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생명의 푸르름이 현란하다.
'비수구미(秘水九美)'는 '신비로운 물이 빚은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이다. 비수구미 마을로 향하는 호젓한 산길에는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짙은 녹음과 크고 작은 바위가 계곡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다. 육지 속 섬이라 불릴 만큼 천혜의 자연으로 아름답게 보존된 청정지역 속으로 들어선다.
더욱 열기를 식히는 소나기가 숲을 스치고 지나가자 뜨거운 햇살이 내려 쬔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깊고 호젓한 숲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계곡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내내 우리 곁을 따라오고,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막이라 수월하다.
해산령이 드라이브를 즐기며 여유 있게 신록을 감상하는 코스라면, 비수구미 계곡은 두 발로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그러나 흘린 땀과 수고에 빼어난 경치로 화답하는 매력적인 코스다. 푸른 나무들이 지천으로 들어선 여름 숲에 이르니 잠시 자괴감에 빠져든다. 저마다 홀로 섰으면서도 조화로운 숲을 이루는 자연스러움.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잎이 무성한 나무와 성긴 나무의 저 평등한 동거. 여기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으며, 아무런 어리석음이 없다.
숲은 실로 이상적인 공간이다. 산은 진정 순수한 지혜의 도량이다. 숲길은 걷는 순간 스스로를 제법 사람답다고 느낀다. 산이 보듬어주는 덕택이다. 온갖 수목들이 섞여 우거진 숲속 깊이 들어갈수록 시원하고 어둑하다. 숲은 길게 이어진다. 전나무 그림자 잠잠하게 내린 소로도 구불구불 줄기차게 이어진다.
엄청 오래된 뽕나무 밑에서 오디를 따서 바로 먹는 야생도 맛본다. 산속에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하고 때론 이름 모를 야생화에 감탄하면서 산길을 걸어간다.
다리 밑 계곡에서 맑은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소리 들으며 함께 하는 식사는 지상 최고의 만찬이다. 시원한 냉 막걸리 한잔에 온 유월의 숲속 열기는 달아난 지 이미 오래다.
구불구불한 산길에는 깊은 고독이 스며있다. 고독은 그림자 되어 산객에게 어김없이 다가온다. 심연의 고독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이 어떠한 지 그 실타래가 보이는 듯하다.
더운 한낮의 햇볕이 한 점 새소리마저 흡입한 탓인가. 비수구미 산길에 적막이 가득하다. 한바탕 삶의 여정이 끝난 뒤의 정적이 이런 것일까. 삶이 끝나는 순간에도 이렇게 황홀한 고요에 닿게 될까.
한국 전쟁이 끝나고 외지인들이 모여들어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비수구미 마을은 평화의 댐 일원에 조성된 평화의 종과 비목공원 등이 안보관광지로 부각되면서 일반인들에게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2시간 걸려 도착한 비수구미 마을은 1970년대 초반, 화전이 금지되면서 원주민들은 거의 다 떠나고 지금은 몇 가구만이 단출하게 남아 있다.
마을에서 산중턱으로 이어지는 적막하고 고즈넉한 현수교를 느릿느릿 걷다 보니 마음이 여유롭고 충만해진다. 시간이란 달리는 기차와 같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시간을 쫓아가지 않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파로호 호반과 접해있는 숲길이 나온다. 5월의 태양은 호반 위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지만 숲속 길로 접어들자 이내 꼬리를 내린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여린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물소리인 듯 새소리인 듯 가물가물 들려오는 이런 저런 소리들이 기분 좋게 귓전에 머물다 간다. 이런 길을 걸으며 마음이 열리지 않을 이, 행복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주변에 서있는 초목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가 진하다.
마지막 산허리를 한 굽이를 넘어서면 파로호 끝자락에 평화의 댐 선착장이 한 눈에 들어오고, 산자락 끝 물가에서 낚시대를 담군 채 졸고 있는 강태공의 모습이 그리도 안온하게 느껴진다.
눈길조차 마주하지 못했던 강태공이 바삐 걸어가는 우리 일행에게 한 마디 하는 듯하다.
"여보게. 뭘 그리 서두르나. 어차피 인생은 뚜벅뚜벅 걷는 것인데. 앞서려 서두르지 않으면 인생이 여여(如如)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