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랑해지고 싶다. 유쾌하고 신나서 두 발을 엇갈려 뛰며 깡충거리고 싶다. 그런 날들은 이미 가버렸지만, 아직도 명랑한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진정성이 없는 시대, 모두가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가면을 쓰고 건성건성 살아간다.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그저 연예인들에게 열광하고, 깊은 고뇌에 빠져 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은 알바로 하루하루 연명한다. 좀 배웠다 싶은 청년들은 취업에 지쳐있다. 일벌레가 되어야 가족들 먹여 살릴 수 있는 중년은 일에 치여 사는 게 뭔지 고민 따위는 사치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평생 죽도록 일해서 남은 건 늙은 몸뚱이뿐인 노년은 이 겨울이 너무 춥다. 이러니 명랑해지려야 명랑해질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서민들의 인생이다.
그래도 명랑해지고 싶다. 즐거워지고 싶다. 이 겨울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는 것’을 깨닫고 싶다. 세상을 더 잘 이해할 가능성은 적지만 나는 여전히 명랑하고 즐거운 그것을 발견하고 싶다. 세월이 놓치고 감각이 놓친 즐거움을 찾아 기억의 창고를 뒤지며 차갑게 식은 삶에게 온기를 불어넣고 싶다. 매일 미친 듯이 부글부글 끓어대는 뉴스도 끊고 아무 말 잔치하는 유튜브도 끊고 나면 조금 명랑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삶이란 아름다울수록 간결하듯이 말이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읽으며 마법처럼 그냥 즐거워지고 싶다. 생각만 해도 가슴 속에 있는 어떤 즐거움이 명랑하게 올라오는 것 같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인생도 기다림이다. 기다림에는 무한한 즐거움이 숨어 있다. 그 기다림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끝내 즐거움의 맛을 볼 수 없다. 기다림 속에는 슬픔이 숨어 있고 고통도 숨어 있다.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와 너의 간극은 태평양처럼 멀어진다. 비참하고 황폐한 감정의 끝에 매달려 매일 지옥의 창문 앞에서 서성인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순간 모든 사소한 것들이 위대해진다. 존재감이 없던 것들이 존재의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난다.
한 번도 그리움 밖으로 걸어 나오지 않은 사랑이 있다면 그건 희망의 증거다. 꽉 잡은 손아귀의 힘, 곧추세운 등뼈의 강인함, 온몸을 순례하는 뜨거운 피의 여정이 기다림을 통해 그리움으로 바뀌는 순간 희망이 된다.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며 사소함으로 희망을 불러보아야 한다. 이 땅에 있는 온갖 부패와 부조리가 썩어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림으로 그리움을 견뎌야 한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외진 가로등 밑에서 눈물을 훔칠지라도 고집 센 나의 인생이 시들어갈지라도 기다림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 기다림 끝에 막막하게 서 있는 이정표 앞을 지나가면서 나의 기다림은 상처가 아니라 자유였음을 고통이 아니라 희망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읽으며 처음 사랑을 알았다. 기다림을 배우고 즐거움을 알아 가면서 인생이 갔다. 그러니까 황동규 시인이 늙어갈 때 나는 그보다 조금 덜 늙었고 황동규의 시가 익어갈 때 내 인생도 익어가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이불을 덮고 살았고 같은 국가의 폭력을 견디고 같은 국가의 번영도 누렸다. 그는 이미 많이 살아서 보살처럼 늙었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젊고 푸르고 싱싱한 언어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내 편두통을 깎아내 이제 좀 편해지려고 할 때 다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기다림이 그리움으로 바뀌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또 편두통에게 내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황동규를 말할 때 황동규보다 황순원이 먼저 떠오르는 건 ‘소나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못해 햇살처럼 찬연한 시적인 소설 ‘소나기’처럼 황동규의 시도 찬연하다. 그 찬연함 위에 반듯한 기와집같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는 아름다운 시간이 있다. 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황동규만이 만들 수 있는 시간 위에 앉아 삶의 감각을 맛본다. 십일월이 다 갈 때쯤이면 더욱 황동규가 떠오르고 ‘즐거운 편지’가 떠오른다. 답답하고 꽉 막힌 현실에서 실족하려고 할 때 ‘삼남에 내리는 눈’을 읽고 환한 대낮에 몰려오는 공포를 감당하지 못할 때 ‘나는 바퀴만 보면 굴리고 싶다’를 읽는다.
또 어지러운 저녁이 몰려올 것이다. 누군가는 미친 듯이 악다구니를 쓰고 누군가는 모함하는 일로 존재감을 느끼고 또 누군가는 진창 술을 마시며 영혼 없는 저녁을 보낼 것이다. 세상이라는 상투적인 수사를 비웃으며 우리는 또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이 지리멸렬한 인생에게도 아직 술독은 비워지지 않았다. 술에 취해 보고 시에 취해 보면서 탕자처럼 언어의 고향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거기 황동규가 뿌린 언어의 씨가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즐거운 편지’를 보내 주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