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로 칼럼] 밖으로 나가는 존재

임이로

몇 달 전부터 한자를 공부하는 일에 재미가 들렸다. 볼펜으로 쓰다 보니 글씨 맛이 안 나는 거 같아 붓과 종이를 살까 싶었지만, 또 방안에 애꿎은 공간만 차지할까 포기하려 했다. 그러던 중에 읽던 책에서 인상 깊은 구문을 발견하고는 바로 재료를 사 붓글씨를 시작했다.

 

- 직선은 생각이 뻗어간 흔적이고 한일자는 빈 것 위로 밀고 나가는 사람의 몸입니다.

<김훈 저, 저만치 혼자서, 명태와 고래 중에서> -

 

그동안 나는 연필과 펜, 그리고 키보드 자판을 사용해 좌에서 우로 글을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붓글씨를 써보니 읽은 책 구문처럼 붓은 좌에서 우로 써가는 동시에 종이를 향해 힘을 싣고 띄우는, 즉 위아래 방향감각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새로웠다. 기존의 글쓰기가 점과 점을 선으로 잇듯, 단어와 단어를 이어 2차원으로 진행하는 것이라면 붓글씨는 단어에 의미를 담는 것 외에도 글씨 굵기와 획을 긋는 모양새로 글씨 자체에 입체적인 감정을 싣는 일이 가능하다. 요즘 세상에선 느끼기 힘든 신선한 감각이다.
 

문득 예전에 한 팟캐스트 방송에 공군 비행 조종사가 나와 말하기를, 하늘에 떠 있을 적에는 공간 감각이 좌우 그리고 하늘뿐 아니라, 발아래까지 확장되기 때문에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 심리적 스트레스가 육지에서보다 상당하다는 말이 기억났다. 조종사는 공간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필시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를 것이다. 

 

한방에서 신체에 흐르는 ‘기’를 읽어 혈점을 자극해 치료하는 침술도 마찬가지다. 한방이 만약 전승되지 않았다면, 환부에 직접 손을 대 치료하는 양방이 대세인 현대 의학에서 침술은 환상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신기한 마법처럼 여겨졌을 테다.

 

또한, 컴퓨터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하이퍼링크 기술을 통해 우리가 전 세계인들과 실시간, 그리고 산발적으로 만나고 소통하며 정보를 얻는 일 또한 인류가 얻어낸 새로운 감각이다. 이처럼 새로운 도구와 기술은 계속해서 우리의 우주를 확장하는 일을 돕는다. 한자를 쓰려고 붓을 쥔 순간, 내게는 위에서 아래로 글씨를 누르고 띄우는 ‘붓글씨’라는 감각 세계가 열리고, 하늘을 나는 순간 ‘비행’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몸에 익혀 우리가 사는 육지를 내려다보게 되는 새로운 시야와 관점이 발생한다. 그리고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디지털 공간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접속한다.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감각뿐 아니라 ‘타인을 만나는 일’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 한 공기 앞에 앉은 자식 된 자의 마음, 고향 친구와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주는 시원한 목 넘김이 주는 우정의 유쾌한 맛 또한 ‘자아’에서 벗어나 ‘타인’이라는 세계로 입장하는 새로운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을 깨치고 익히는 일은 즐겁다. ‘실존’을 뜻하는 단어 Existence가 ‘밖으로, ~을 넘어서’라는 ex-라는 어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밖으로 나가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150?~250?)는 ‘모든 것은 공(空) 하다’했다. 이는 허무와 냉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일어나 상호의존하는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가득 찬 잔에는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 우리는 매번 ‘나다운 것’으로 끊임없이 의식을 가득 채우기 위해 괴로워하고 애쓰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 ‘나’라는 존재의 당위성을 비우고 진정한 타자와 마주하며 안 해본 것을 시도하는 경험만이 우리가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 내일을 살아갈 희망을 마음에 채울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어느 정도 자리가 남은 공간이라야 연인에게 받은 엽서 한 장, 또는 꿈을 담은 멋진 붓글씨 하나 빈 벽에 걸며 뿌듯해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는 언젠가 깊은 영감이 되어 세상에 나비효과를 일으킬 단 하나의 발견 혹은 발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왜 봄이 찾아오면 꽃놀이를 가고, 가을에는 단풍을 보러 휴일에 애써 길을 나서나. 집안에 인조 벚꽃과 단풍을 가져다 놓고 사시사철 보면 될 일일 텐데. 이는 내 존재 밖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실존과 만나는 기꺼움과 반가움 때문일 것이다. 매번 다르게 부는 바람과 내리는 비를 온전히 맞으며 피워낸 생화의 향이라야, 더 그윽한 봄과 가을 세계가 펼쳐지리란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나를 넘어, 밖으로 나가보자. 바깥에 펼쳐질 세상은 다채로운 풍경과 그 향기로 가득하다. 찬란하다.

 

 

[임이로]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수상

메일: bkksg.studio@gmail.com

 

작성 2023.12.08 10:22 수정 2023.12.0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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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