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제2차 당항포해전 당시 어선포해전지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았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경남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가 어선포"라고 밝힘

수많은 현장 답사와 문헌 고증을 통해 밝혀낸 개가

 

임진왜란 강화협상기에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던 삼도수군 통제영의 이순신 연합함대가 괭이바다 일대로 진출한 적선 31척을 격파한 해전을 제2차 당항포해전이라고 한다. 1594년 3월 3일(이하 음력)부터 5일까지 이순신 장군이 펼친 해상봉쇄작전과 어영담이 지휘한 특수임무부대의 기동작전으로 적선 31척을 모두 소탕하고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3월 3일 오후 벽방산(경남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에서 망을 보고 있던 벽방망장 제한국이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를 지나 서진해 오던 적선 31척 중 21척은 고성 당항포(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로 들어가고, 7척은 진해 땅 오리량(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주도리와 수우도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2척은 저도(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저도리, 일명 돝섬)로 가는 것을 포착했다. 제한국은 즉시 한산도의 이순신 장군에게 적의 동태를 알렸고 이날 저녁 무렵부터 대규모 해상 봉쇄작전이 개시되었다.

 

3월 3일 밤 은밀하게 한산도를 출발한 이순신 연합함대는 밤 10시경 지도(紙島, 통영시 용남면 지도리) 앞바다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인 3월 4일 새벽 이순신은 전선 20척으로 견내량(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의 좁은 해협)을 봉쇄한 후 주력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북단의 증도(甑島,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실리도, 일명 시리섬)로 가서 학익진을 펼쳐 적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도망갈 해로가 막혀 독안에 든 쥐의 형국이 된 적을 소탕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은 진해 바다(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일원의 바다)의 지리를 가장 잘 아는 어영담을 인솔 장수로 지정하고 3월 4일부터 5일까지 대대적인 수색과 소탕작전에 나섰다. 어영담은 전라좌도에서 10명, 전라우도에서 11명, 경상우도에서 10명 등 모두 31명의 장수와 날랜 전선을 차출하여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했다.

 

어영담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3월 4일 진해 선창(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에서 적선 10척을 발견 후 추격하여 읍전포(마산합포구 진동면 고현리)에서 6척, 시굿포(마산합포구 진동면 주도리, 일명 왜꽂이 또는 섶굴개)에서 2척, 어선포(경남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에서 2척을 각각 불태워 없앴다. 이날 당항포로 간 적을 치기 위해 당항만 깊숙이 쳐들어간 특수임무부대는 날이 저물어 당항만 입구의 아자음포(경남 고성군 동해면 외산리 일대로 추정)로 물러나 입구를 봉쇄하고 밤을 새웠다. 다음날 조선수군은 당항포로 들어간 적선 21척을 모두 불태워 격침시켰다.
 

제2차 당항포해전을 나는 오래전부터 '괭이바다 해상 봉쇄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이 해전은 천문과 지리 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과 증도 일대를 봉쇄하고, 괭이바다로 진출한 왜군을 일망타진해버린 최고의 작전으로 평가된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이순신 전적지를 300회 이상 답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등장하는 지명을 확인하기 위해 고지도를 들고 현장에 가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한 후 역사자료와 문헌으로 교차 검증하는 작업을 해 왔다. 이번에는 어선포해전지에 대하여 그간 현장에서 취재한 내용과 여러 문헌 기록을 교차 검증하여 그 위치를비정(比定) 하고자 한다.

 

문헌 기록들을 살펴보면 '경상도지리지(1425)'의 고성현 토성조에는 의선향(義先鄕)에 박씨와 김씨 두 성이 있다고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고성현 고적조에는 당항포가 현 북쪽 30리에 위치하고 의선향은 현 북쪽 40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성현에 살았던 구상덕이 1725년에서 1761년까지 37년간 쓴 일기 '승총명록'에 어선(漁善)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18세기 후반 전국의 호구 현황을 기록한 통계 기록인 '호구총수(1789)'에는 고성현 회현면(會賢面)에 어선리(漁鮮里)가 기재되어 있다.

 

호구총수(1789)에 기록된 고성현 회현면 어선리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72년지방지도'의 고성부 지도에도 어선(語善)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인 1910~1930년에 회현면을 회화면으로 개칭하면서 작성한 지도를 호구총수와 비교해 보면 어선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872년 지방지도의 고성부 지도의 어선(語善)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10~1930년 회화면 지도, 국토정보플랫폼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1917)'에 따르면 고성군 회현면의 어선(語善), 신복(新卜), 산북(山北) 3개 마을을 합쳐서 어신리(語新里)로 명칭을 바꾼 것이 확인된다.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1917) / 국회도서관

 

결론적으로 제2차 당항포해전 당시의 어선포는 조선 초기에 '의선'으로 불리다가 임진왜란기에 '어선'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자 표기는 조금씩 달라도 '어선'이라는 지명이 일관되게 존재했다. 현재도 지역민들 중에는 어신리를 어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인 임진장초 '당항포파왜병장'에는 "당항포에 유박한 왜선은 대선 중선 소선을 합쳐 21척인데, (어선포에서) 불타는 연기를 바라보고는 모두 기운이 꺾여 스스로 세력이 궁함을 알고 육지에 내려 결진하였습니다. 순변사 이빈에게 다시 육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고, 어영담에게 명령하여 인솔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바로 그곳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수가 빠져나가고 날이 저물어 진격하지 못하고 당항포구를 가로질러 막고 밤을 새웠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3월 4일 당항포에 있던 적이 불타는 연기를 바라보았다면 어선포에서 적선 두 척을 불태우는 것을 약 10리 거리의 당항포에서 육안으로 바라본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어선포를 당항만 바깥의 괭이바다 일대에 있는 통영시 용남면 또는 고성군 동해면 일대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당항포 입구인 당목(고성군 동해면과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잇는 동진교 다리 아래 좁은 목) 바깥 바다 쪽은 아무리 연기가 피어올라도 당항포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현장 답사와 고지도를 통한 탐색, 호구총수 등 여러 문헌 기록, 조선시대 현지인이 쓴 일기, 임진장초에 나타난 전투 당일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어선포는 당항포에서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10리 정도 거리에 위치한 경남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3.12.11 11:10 수정 2024.04.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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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