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숨어 있다. 그것은 깨뜨려서 소통할 수 있고, 그대로 두어 불통할 수 있다. 많은 장벽 중 갈라치기로 분열시키는 세대 갈등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탯줄인 듯 대물림되고 있다. 지나간 것은 굴절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현재도 살기 팍팍한데 과거가 더 힘들었다는 아련한 낭만을 논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마감이 임박했다. 급히 등기로 보내야 할 중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이제 인쇄만 하면 된다. 아뿔싸, 어쩌다 한두 장만 인쇄하였기에 당연히 프린터기의 잉크 잔량이 충분할 줄 알았다. 오래 방치하면 녹이 슬듯, 잉크도 애태우다 마르나 보다. 별수 없이 지척에 있는 문방구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어느 때고 인쇄할 수가 있다.
데스크 탑 앞에 한사람이 대기 중이다. 한 명은 의자에 앉아서 인쇄하는 중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편안히 문구류를 둘러본다. 대충 둘러보다 돌아왔다. 여태 그대로의 풍경이다. 가만히 보니 임용고시 준비생인가 보다. 10 분, 또 10분, 다시 10분... 조금 멀미가 나고 있다. 내 앞에 선 젊은 여자는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본다. 가끔 한숨을 뱉어 지루함을 몰아낸다. 그러나, 재촉하거나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은지 묻지 않는다.
얼마 전 이곳에서 여든 장가량을 인쇄한 적이 있다. 뒤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히 앉은 내가 안절부절못했다. 몇 장 인쇄할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세 장이란다. 먼저 하라고 일어서며 비켜주었다. 그 생각이 떠올라서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는 앞사람에게 몇 장 인쇄할 것인지 물었다. 단 한장이란다.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더했다. 한 시간이 넘었단다.
나라면 몇 장인지 슬그머니 떠보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오후 두 시경 너무 졸음이 밀려온다. 카페인을 취하면 밤잠에 지장을 초래한다. 살짝 두통까지 밀려와 별다방을 찾았다. 주문할 줄이 제법 길다. 젊은 사람들이 서 있다. 가만 보니 배낭을 맨 백발의 할머니가 커피를 주문하고 있다. 커피 쿠폰을 받았는데, 스마트폰 사용이 미숙하여 헤매는 듯하다. 유니폼을 입고 주문을 받는 직원이 백발과 얼굴을 맞댄다. 기기 조작을 도와준다. 나같으면 핸드폰을 건네 받아 직접 했을 것이다. 직원은 하나하나 침착하게 할머니가 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있다. 당연히 대기줄이 길 수밖에 없던 게다. 직원도 놀랍지만 나는 묵묵히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경이로웠다.
화담숲에 갔었다.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한 시간 전에 입장할 수 있다는 문구를 기억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간 날은 유난히도 청명했지만 햇살이 그만큼 따갑다. 바코드로 찍혀야 입장이 가능하단다. 연로한 부모님이 피곤하실까. 인정에 호소해본다. 직원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기에 우리는 대기 시간을 조금은 지루하게 보낸다.
뱅커였던 나는 긴 대기줄에 민감하다. 번호표를 빨리 눌러서 줄을 없애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소명 의식이 아직 살아있다. 방카슈랑스나 펀드 신상품을 설명하거나 복잡한 제신고 업무를 처리하려면 시간이 꽤나 소요된다. 호명은 빨간 신호등처럼 멈춰 있다. 대기줄은 늘어나지만 좀처럼 나아가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참을성 없는 성격을 드러내는 고객이 한 둘씩 출몰하곤 했다. 왜 이렇게 번호표가 넘어가지 않느냐는 거다. 돈이 관련된 업무라서 예금 해지시에는 본인확인은 필수이다. 당연히 신분증 검사는 꼼꼼해야 한다. 지참하지 않는 신분증에 제동을 걸면 얼굴이 신분증인데 왜 안 주느냐 큰소리치는 부류도 있다. 문방구의 줄과 별 다방 줄의 MZ라면 어땠을까.
MZ세대는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에 출생한 밀레니엄 세대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에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로 남과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과거에 매몰되어 현재에 프레임을 씌우면 곤란하다. 현재는 현재대로 과거는 과거대로 힘든 것도 좋은 것도 인정해야 한다. 현재의 젊은이도 그때처럼 눈물겹도록 치열하다. 그때도 옳고 현재도 옳다.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하는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요즘 세대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는 말이 있다. 불편함과 기다림을 감수하는 선착순에 큰 박수를 보낸다. 투명한 것을 좋아하고 불투명한 것을 경계하는 MZ가 참 마음에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노력에 응답하는 선착순처럼, MZ가 수긍할 수 있는 능력만큼 투명한 사다리이길 바란다.
[민은숙]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전국여성문학대전 당선
문화도시 홍성 디카시 수상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명인명시 아티스트 대상
제8회 대한민국 문화교육 대상
제22회 대한민국 문화예술 대상
2023 대한민국 중견작가문학대상
2023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산맥 웹진 편집위원
열린동해문학연합회 사무국장
대한민국 중견작가 산문집 ‘한편의 글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