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고통을 이기고 사랑은 미움을 이긴다. 그러나 사랑은 슬픔에 지고 이별에 진다. 폭발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게 사랑이다. 인간이 지닌 감정 중에 가장 많은 아드레날린 품어대는 것이 사랑의 감정이다. 그렇다.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감정이다. 인간은 사랑이 만랩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고 해탈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기껏해야 남녀 간의 사랑이나 가족 사랑의 범주 안에서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 살지만, 최고치의 사랑을 갱신해 신이 된 예수나 부처를 보면 신앙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사랑 중의 사랑을 꼽으라면 단연 남녀 간의 사랑이다. 기본 중의 기본인 남녀 간의 사랑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꼭 사고를 친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맹목해서 집착증에 시달리거나 스토킹으로 자신도 모르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사랑이란 감정의 교류이며 공감 능력의 문이 열리는 시발점이다. 사랑을 해봐야 인생의 쓴맛도 알고 단맛도 안다. 불행도 알고 행복도 안다. 천국도 알고 지옥도 안다. 사랑은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를 함의하고 있다. 사랑은 생존에 꼭 필요한 정신적 시스템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생존능력이 올라가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교에 빠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 예외적인 우주적 시간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치명적인 열병으로 나타난다. 사랑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인생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적 공감을 통해 내 안으로 깊이 침투해온 타자라는 바이러스는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지구 최상의 바이러스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랑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최고의 정신적 즐거움을 맛본다. 그러니 어찌 사랑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 년 전 고려의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을 하다가 어떤 이유인지 이별을 하게 되면서 그 애절한 마음을 시에 담아 노래했다. ‘가시리’를 읽어보면 누구나 그 애절함에 감염되고 만다.
가시려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위 증즐가 태평성대
님 잡아 둘 것이지만
서운하면 아니 올까 봐
위 증즐가 태평성대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젊음은 그런 거다. 사랑에 올인하는 것, 사랑에 눈멀어가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의 갑옷을 벗고 메타인지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도 언어만 다를 뿐 사랑의 감정으로 인간이 되어가고 어른이 되어간다. 자연성으로 발현된 감정이 인간성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사랑할 용기가 없는 사람, 사랑 따위는 별거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연계에서 서서히 퇴출당하는 중일 것이다. 자연적 생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라며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구절을 읽다 보면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사랑은 단순하다. 긴말 필요 없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은 상대를 서운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상대의 눈에 눈물 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외롭지 않게 하고 서럽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마음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로지 상대만 바라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려하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그 어떤 사랑이 이 정의를 넘어설 수 있겠는가.
사랑을 해야 사랑할 줄 안다. 사랑을 통해 사랑을 배우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삶을 배우고 사랑을 통해 죽음을 배운다. 건성으로 사랑을 사랑한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생물학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사랑을 통해 지혜를 배우고 지혜를 통해 인간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잘해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다. 보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다. 이기심이 없는 상태 그게 사랑이다. 욕심이 없는 상태 그게 사랑이다.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가시리’가 천 년 전 고려 사람들의 평범하고 애절한 사랑노래이듯이 천 년 후 우리에게도 여전히 평범하고 애절한 사랑노래다. 단순함이 진리이듯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순한 명제 앞에서 오늘도 그를 향한 그리움을 불태운다. ‘겁쟁이는 사랑을 드러낼 능력이 없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의 특권이다’고한 간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고 보낸 님을 향해 돌아오라고 말할 용기쯤은 가지자. 진심 그가 보고 싶으면 말이다. 그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으면 말이다. ‘가시리’의 그도 말했지 않았던가.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