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학 입시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우리 반 학우들에게 물은 질문이었다. 나는 무심코 “이해하는 거요.”라고 답했다. 주변이 조용했던지라 내 목소리가 교탁에 계시던 선생님께 그대로 흘러갔다. 선생님은 흥미로운 눈치로 ‘무엇을?’이라 반문하셨지만 난 낯부끄러워 ‘그냥, 많은 것들을요.’라고 답을 무마했다. 선생님은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이며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이해하려면 스스로부터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해.”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도전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열정을 태어나 처음 가슴에 품었다. 아쉽게도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방에 천지지만, 그때 선생님과 나눈 짧은 대화는 지금까지도 마음속 화두로 남아 인생길을 밝혀나가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왔다.
내겐 은사님이 또 한 분 더 계신다. 고등학교 시절 방황하고 있고, 앞으로 오랜 시간을 방황할 탕아를 어찌 알아보셨는지 날 많이 살펴봐 주신 담임 선생님이었다. 문학 수업 때, 은사님이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낭독하시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순간 밀려오던 구슬프고 생경한 감동을 동력 삼아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좋은 어른을 만나 다행이다. 참 운이 좋았다.
예전부터도 난 어쩐지 세상을 삐딱하게 꺾어 바라보곤 했던 어리숙한 아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정 따르고 싶은 어른을 만나고 싶었고 언젠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부린 치기였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의문은 계속해서 고개를 든다.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답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어느새 어른이 되었지만 살다 보니 ‘좋은 어른’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애매모호하기 짝에 없다. 여전히 살아내는 일은 녹록지 않다. 그렇게 ‘내 코가 석 자’로 바삐 지내다 뉴스에서 한없는 방황 끝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어린 학생들에 대한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그들 이야기는 내게 남 일 같지 않다. 학창 시절 운 좋게 길잡이가 되어준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성적과 순위에 치중한 교육열에 학생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을 겨를조차 허락하지 하는 학풍 속에서, 내가 저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나도 살아오면서 번민에 사로잡혀 방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린 그들은 얼마나 더 버거울까 싶어서.
한데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방황하는 아이들의 극히 일부분만 보고 너무도 쉽게 ‘타락’으로만 판단해버리고 마는 거 아닐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인생에 배움을 청할 스승이 필요하다. 성적과 등수를 매기는 역할이 아니라, ‘어떻게 살지’를 함께 고민하고 발맞춰 걸어주는 존재 말이다. 그들이 훌륭한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리숙한 나를 믿어주고 지켜봐 주는 사람, 같은 어려움에 부닥쳐 해결해본 경험을 가진 사람에 대한 신뢰가 결국 우리에게 이 추운 겨울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갈 힘이자 버팀목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문득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르는 눈 내린 까만 저녁이다. 오늘 내 스승은 꼭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좋은 글과 음악, 하물며 오늘 새벽에 내린 싸라기눈조차 소중한 스승의 은혜가 될 수 있으니까.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 그렇기에 누구나 인생을 헤맨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조차 귀한 가르침이리라.
눈 내린 밤길, 우리는 각자 가진 추위를 견뎌 저마다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다. 함께 나아가는 동안 그렇게 눈 녹듯, 서로가 서로에게 봄이 되어주면 좋으련만.
[임이로]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