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정오 경에 이순신 함대는 거제 옥포에서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 승리를 거두고 그날 오후에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永登浦, 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이동하여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 척후장으로부터 멀지 않은 바다에 적선 5척이 항행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여러 장수들을 시켜 신시(申時, 오후 4시) 경에 추격하여 합포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버린 적의 함선 5척을 모두 불태워 없애고 승전한 것이 합포해전이다.

최근 합포해전지가 어디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합포(合浦)는 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산호공원 아래라는 주장과,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鶴浦) 마을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일찍이 이충무공전서를 국역한 노산 이은상과 조성도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가 합포해전지를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으로 비정(比定)했다. 최근에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이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지에 '합포해전지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 소장은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와 함께 요트를 타고 판옥선의 속도로 항행하면서 현장 실측 검증까지 마친 후 합포해전지는 마산만 일원이라고 밝혔다.
합포해전의 최대 승리 요인은 이순신 장군이 척후선으로부터 적선 5척이 멀지 않은 바다 가운데에서 항행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추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전방에서 상황이 발생한 것을 척후선이 신속하게 보고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 지휘관이 초동 대처를 잘하여 적을 추격 섬멸할 수 있었다. 만약 적선을 발견하고도 우물쭈물 시간을 끌었다면 적은 이미 도주하고 시야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자 사도첨사 김완,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어영담이 각기 왜군 대선 1척을 불태워 부수고, 방답진에 귀양 와 있던 전 첨사 이응화가 소선 1척을 격파하고 군관인 변존서와 송희립, 김효성, 이설 등이 힘을 합해 활을 쏘아 왜군 대선 1척을 격파했다. 총통으로 포격을 가한 후에 불화살을 쏘는 당파분멸(撞破焚滅) 전술이 주효했다.
전투가 끝난 후 신속하게 합포만을 빠져나온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합포 일대는 왜 육군이 점령한 상태로 좁은 합포만 해안에는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순신함대는 밤을 타고 노를 재촉하여(乘夜促櫓) 좁고 깊숙한 합포만을 빠져나와 남포(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난포리, 원래 지명이 남포藍浦였는데 약 20여 년 전에 지역민들이 난포卵浦로 개칭)까지 내려왔다.
남포에 와서도 배를 해안에 정박하지 않고 남포 앞바다(藍浦前洋)에 진을 치고 밤을 새운(結陣經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육지의 적들이 밤중에 은밀하게 배에 접근하여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바다 가운데 진을 치고 잤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수군이 신속하게 추격전을 벌여 거제도 영등포에서 합포만까지 진출하여 일몰 전에 전투를 끝낸 속전속결이 합포해전의 승리 요인이다. 천문과 지리에 능통한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전투를 끝내고 밤중에 구산반도 끝자락까지 퇴각하여 병사들의 안전을 도모한 것도 높이 평가된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