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광대 아닌 광대

허정진

상쇠의 신호음이 울리자 “딴딴 따다단”“쿵쿵 쿵더쿵”“갱갱 갠지갱”삼현육각의 모든 악기가 제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농자천하지대본’ 농기와 오색 영기가 앞잡이를 서고 상모와 고깔을 쓴 잽이 들이 뒤따른다. 풍물굿과 탈춤이 어우러져 한마당 판굿을 벌인다. 변화무쌍한 가락과 다양한 발림 동작이 갖가지 진풀이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펼쳐진다.

 

켜고, 불고, 두드리는 악기 소리에 공터로 모인 사람들이 신명으로 들썩인다.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잠자던 몸 세포들을 구석구석 흔들어 깨운다. 굵고 넓은 징 소리는 폐부 깊은 곳까지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장구의 궁채와 열채 장단에 어깨가 들썩거리고, 승전보를 앞세운 말발굽 소리 같은 우렁찬 북소리는 심장을 마구 쿵쾅거린다. 오감이 흥분되고 오체가 술렁인다.

 

광대들이다. 우스꽝스러운 탈을 쓰고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정해진 대열이나 추임새는 없지만 관객의 흥과 재미를 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고 있거나, 어울리고 싶은데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놀이판에 끌어들이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다. 너도나도, 연기자도 관객도 하나가 되어 한바탕 신명 나게 놀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든다.

 

진작부터 어깨를 덩실거리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광대의 손에 이끌려 거리낌 없이 놀이마당에 끼어든 그는 익살스러운 몸짓과 신명 나는 춤사위로 관객들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다. 그는 참여를 원했기에 스스로 즐거웠고, 나는 구경만을 바랐기에 스스로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광대는 다음 순으로 나를 지목했다. 넋 나간 사람처럼 헤픈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게 잘못이었다. 

 

손목을 끌어당기고, 아니라고 손사랫짓하며 몇 번의 실랑이가 오고 갔다. 기분은 흥겹지만 마음은 놀이판에 끼어들 만큼 숫기 있거나 호기롭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미 쏟아진 관객들의 호기심을 볼모로 여간해서 놓아주지를 않는다. 마음은 불편하고 거북한데, 늪지에 빠지듯 험지로 몰아넣는 그가 못마땅하다. 뭇시선 속에 긴장과 부담감을 조성하는 그에게 화가 난다. 

 

속으로 외친다. 난 광대가 아니야! 그리고 남들 앞에 광대 노릇을 하기도 싫어! 사람마다 취향과 성정이 다른 법이야. 비 오는 날이 울적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기분이 달뜨는 사람도 있고, 어울려서 웃고 떠드는 것보다 혼자여서 편하고 의지적인 사람도 있단 말이야. 누구나 흥겨우면 춤추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의 이기적인 판단이야. 난 그냥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기는 중이야. 재미있는 공연을 만들겠다는 의도에 내가 사용되는 것도, 내 모습이 남 앞에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싫어.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세상도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방관자였지 참여자는 아니었다. 어쩌면 소심증적 낯가림이나 소아병적 자존감의 한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주목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흉이나 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의 평가나 시선이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그럴수록 세상살이에 남과의 방어벽과 경계선을 세우는 일이 많아졌다. 읽기 전용만 허용했을 뿐이지 댓글 달기는 차단했다. 완곡한 단절이 화려한 소통보다 편했다.

 

박정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적빈한 삶은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도 인색했다. 나를 내보이지 않았는데 남의 아픔과 외로움을 알아주어야 할 이유가 없었고, 빚진 일도 없는데 갚아야 할 은혜도 없다는 식이었다. 세상 살아가는 처세와 요령은 알고 있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한 숙제며 회의였다. 짐짓 모르는 체 한 발짝 멀리서 지켜만 보거나 아니면 자신의 품성과 천성을 이유로 거부의 몸부림을 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집안에 잔치가 있었다. 연로하신 어머니도 흥에 겨웠는지 마이크를 잡고 너울너울 춤추며 흘러간 옛노래를 불렀다. 자식이라면 응당 달려 나가 어머니 손잡고 넉살스레 춤추거나 곰살맞게 노래를 따라 불렀어야만 했다. 어머니를 등에 업고 무대라도 한 바퀴 돌았다면 더 마침맞은 분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런 춤도, 그런 노래도 할 줄 모른다는 핑계로 멀뚱하니 제자리만 지켰다.

 

허세와 체면이, 명예나 긍지가, 객쩍다는 느낌 또한 그 젖빛 교감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남 앞에 훌륭한 아들이기 이전에 품 안에 따뜻한 자식이기를 바랐을 어머니였다. 말이 없어도 마주 잡은 손들이 주고받는 언어가, 품위 있고 고상한 백 마디 치사보다 오히려 더 외로운 마음을 쓰다듬지 않았을까 싶다. 풍각쟁인들, 각설이 춤인들 어떤가. 채신머리없다는 게 그리 대수라고 어머니를 위해 어릿광대 노릇 한번 하지 못하는 자신이 스스로 원망스럽다.

 

무리 지어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고 했다. 화려한 한 송이 장미보다 들판에 한 무리로 피어난 제비꽃이 더 황홀한 것 같다. 세상 시름과 고통을 감추고 웃어야 하는 때도 있고, 삶의 섭섭함과 서러움을 밀어내고 군중 속으로 달려가야 하는 때도 있다. 자신을 스스로 고립 속에 몰아넣고, 때로는 교만하고, 까닭 없이 자괴감에 빠져드는 것도 세상을 향한 마음의 길이 닫혀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만을 향한 욕(欲)과 환(幻)은 저 멀리 바람에 날려버리고 가볍디가벼운 존재의 무게가 되어 때로는 허허로운 아나키스트가 되어보는 것은 또 어떨지.

 

포기한 듯 결국 광대가 손을 놓고 돌아선다.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얼굴에 쓴 탈바가지는 여전히 나를 보고 헤실대며 웃고 있다. 주시하던 관객들은 광대가 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허접스러운 광대를 보고 한바탕 웃고 즐긴 셈이 되었다. 광대 아닌 광대였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1.23 10:15 수정 2024.01.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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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