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들은 흔히 “시 제목만 봐도 시인의 역량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시 제목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각종 문학상 심사 과정에서 시 제목만 보고 시인의 역량을 판단할 수 있을까? 모든 역량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문인이 시 제목이 가치 없으면 본문의 내용도 가치가 없다고 인식한다.
몇 년 전 사례이다. 이름난 시인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 우리 지역 문학상 공모전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수상작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문예지 받아 보셨지요?” 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답하였다.
“예,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읽었습니다. 대상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시에 영어 제목을 달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함량 미달입니다.”
갑자기 화기애애하던 통화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솔직한 표현이 때로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잘 안다. 하지만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다. 그 시인은 생각하지 못한 답변에 놀라 “내용이 좋아서…”라고 핑계를 대며 더듬거렸다.
이에 “선생님, 잘 아시다시피 시인의 책무가 우리말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영어 제목을 단 것 자체가 우리말과 시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내용이 좋았다면 대상 선정 후에 시인의 동의를 얻어 영문은 부제로 옮기고, 제목은 달리 수정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주최 측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유명사였다면 문제가 없었겠지요. 목적시의 경우 허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수상작은 목적성과 거리가 먼 시잖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통화하겠습니다.”라며 황급히 통화를 종료했다.
얼마 전 사례이다. 한 시인에게서 시집을 받았다. 세종대왕을 찬양하는 시도 있다고 자랑했다. 시 제목에 영문 표기도 있었다. 외국어와 외래어도 제법 많았다. 그 시인에게 말했다. “시집에 수록한 시 제목만 봐도 세종대왕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욕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시인은 “외국어로 표기해야 좋은 시로 인정받는다고 배웠다.”라고 말했다.
지역 신문 신춘문예 당선자의 말치고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대필한 시로 당선했다는 풍문, 그때 대필해 준 시인이 심사했다는 풍문, 상금은 대필자가 가지고 당선자는 명예만 가졌다는 풍문 등 여러 뜬소문이 진실일 수 있겠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았다. 솔직하게 다시 말해 주었다.
“이 시집에 수록한 대부분의 시 본문에는 우리 문법과 무관한 국적 불명의 번역체 문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언어의 긴장미, 행간의 긴장미, 내용의 긴장미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산문시도 아닌 산문에 행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이런 말과 함께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시인은 일부 긍정하면서도 “출판사에서 시가 매우 훌륭하다고 하던데요.”라며 애써 부정을 거듭했다.
시인이여, 시 제목은 우리말로 표기하시라. 영문으로 표기하면, 우리 모국어와 시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7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