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맛에 길든 사람들은 여자를 모른다. 죽음은 자연적 사건인 동시에 자발적 사고이기도 하다. 여자에게 있어 최고의 위험은 죽음을 첨예하게 인식하는 그 자체다. 그런 여자를 남자들은 정의하느라고 에너지를 너무 쓴다. 인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여자에 대한 편견에도 늘 앞서간다.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여자는 여자이기 때문에 온갖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았다. 이슬람 문화처럼 여자에게 정신적 히잡을 씌워 놓고 사회적 편견을 부추겼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여자는 여자를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그래서 죽음의 맛에 길든 사람들은 여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란 집중된 동물이다.
그 이마의 힘줄같이 나에게 설움을 가르쳐준다.
전란도 서러웠지만
포로수용소 안은 더 서러웠고
그 안의 여자들은 더 서러웠다.
고난이 나를 집중시켰고
이런 집중이 여자의 선천적인 집중도와
기적적으로 마주치게 한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쟁에 축복을 드렸다.
내가 지금 6학년 아이들의 과외공부집에서 만난
학부형회의 어떤 어머니에게 느끼는 여자의 감각
그 이마의 힘줄
그 힘줄의 집중도
이것은 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여자의 본성은 에고이스트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
그러니까 뱀은 선천적인 포로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속죄에 축복을 드렸다.
우리는 알까. 여자가 살아남아야 그 나라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까.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폐허처럼 남은 여자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의 김수영 시인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자의 삶에 영양제를 깊이 놔 준다. 이 난해하고 모던한 시를 통해 김수영은 여자를 여자로 되살려낸다. 포로수용소에서 집중된 여자는 위대한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어느 악조건 속에서도 여자는 위대하다. 그래서 암컷의 위엄은 위대함으로 증명된다. 역사 앞에서 국가 앞에서 가정 앞에서 여자는 위대한 존재다. 수컷이 다 죽고 지구에 없다고 해도 여자는 여전히 위대하고 위대할 것이다.
여자의 삶에 남자는 늘 이방인이었지만 김수영으로 인해 남자는 정주민이 된다. 남자가 바깥에서 살고 싶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 전쟁이었다. 국가가 여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야만이 된 인간들의 바깥에서 야만을 제거하고 문명 안으로 끌어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사람이기 전에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동물이었으며 동물이기 전에 자연이었다. 선천적인 집중도와 기적적으로 마주치게 한 것이 전쟁이라고 고백하는 김수영에게 그 이마의 힘줄같이 설움이 꺼이꺼이 울고 있었는지 모른다.
죽을힘을 다해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여자, 여자의 본성은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라고 김수영은 말했지만 사실 에고이스트라기보다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남자가 아닌 시인의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수영 시인은 여자는 집중된 동물이라고 말해 버리고 만다. 남자가 황제의 주둔병이라면 여자는 노마드에서 탈주를 멈춘 정주민이다. 남자는 정체성 없는 익명의 힘으로 부득부득 침략의 역사를 문신처럼 새기며 살아왔지만, 여자는 삶 안에서 패자처럼 가여운 존재였다. 하지만 진정한 승자는 패자의 모습에서 숭고한 본성이 깨어난다. 그게 여자다. 그게 어머니다.
김수영의 ‘여자’는 낯설면서 친근하다. 대표작도 아니면서 인터넷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며 낯섦을 낯설지 않게 하는 시다. 지금도 여자는 늘 인생의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눈치를 본다. 정신적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한다. 그뿐인가. 바람이라도 날까봐 남편을 감시해야 하고 눈치 없는 시부모 공양도 잊지 말아야 한다. 피곤하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현모도 되기 어렵고 양처도 되기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은 슈퍼우먼을 요구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수영은 북한군에 징집된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 탈출했지만, 거제 포로수용소에 억류되고 말았다. 김수영의 생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수영은 3년 만에 풀려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 알고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김수영이 아내를 찾아가 같이 살자고 애원했지만, 아내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김수영은 그 시절 기자도 하고 번역도 하고 시인도 하면서 겨우 살아갔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아내는 김수영에게 돌아왔다. 김수영과 그의 아내의 정신세계는 요즘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수영은 전쟁을 축복하고 속죄도 축복한다. 그는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는 여자다 등 여자를 나타내는 온갖 수사들을 멈추고 나면 비로소 여자가 보인다. 집중된 동물도 보이고 힘줄 같은 설움도 보이고 감각도 보이고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도 보인다. 여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연구하면 아마 김수영의 정신세계보다 더 너른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사의 편린 앞에 그리고 여자의 관념 앞에 더없이 자상했던 김수영의 정신과 마주하는 일은 그래서 즐겁다. 인간의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하고 현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시로 풀어내는 김수영이 출판사에서 원고료를 받아서 단골집에 밀린 외상값을 내고 나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빛나는 시어들을 더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