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어느 지인의 1980년대의 회상 - 출국

김태식

해 질 녘 어선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는 모습이 보이는 부산 자갈치시장 횟집에서 40여 년 전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났다. 소주 몇 잔을 마시고 부두에서 내일의 출어를 기다리며 안전띠처럼 묶여 있는 어선들을 바라보며 40여 년 전의 악몽과도 같았던 실타래를 풀어낸다. 정 사장이 1983년 원양어선 기관장으로 근무할 때의 얘기다.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경제개발에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국민 대다수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잘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흔히들 우리나라의 경제 주춧돌을 말할 때 월남전 참전과 파독 광부 그리고 중동 근로자들을 많이 들먹인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해외 파견 선원들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직업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원양어선을 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우수한 인력들이 일반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수·해양계 대학에 입학을 많이 했다.

 

1983년 그 당시 한국의 연안어업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스페인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를 잇는 대서양은 한국 원양 선원들이 돈벌이하기 좋은 일터였으며 황금어장이었다. 더욱이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어로 기술이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진 어로 기술을 가진 한국에는 더없이 좋은 어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정 사장은 대서양에서 두 어기漁期(4년 6개월)의 청년기를 보내고 기관장이 되었다. 다음 어기가 시작되기 전에 휴가를 받아 결혼도 했다. 달콤한 신혼의 꿈도 잠시였다. 강요된 헤어짐이 하루하루 다가와 신혼의 꿈도 2개월 만에 끝내고 2년의 계약기간으로 출국을 해야만 했다. 

 

공항에서 눈물범벅이 된 어린 아내를 두고 떠나는 마음은 마치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일 같았다. 결혼 후 두 달 만에 아내와 생이별한다는 것은 서럽고 가슴 시린 일이었다. 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정기관장의 두 다리에는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고 머릿속은 하얀 백지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도대체 돈이 무엇이기에 아내와 생이별해야 하고 삶이 무엇인가”

 

대한민국 남자들은 누구나 병역의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원양어선 선원들에게는 대체복무라는 당근으로 그들을 바다로 나가게 했고 이별하는 공항에서 눈물바다가 되는 슬픈 영화의 한 장면을 찍어야만 했다. 아울러 신혼의 단꿈도 짧은 시간에 무참하게 짓밟히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목숨을 담보로 하는 해상생활은 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정 기관장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하지도 않은 채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

 

작성 2024.02.06 11:36 수정 2024.02.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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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