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구에 당도하자 가장 먼저 향양문向陽門이 나그네를 맞는다. 향양문, 필시 ‘태양을 바라보는 문’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을 게다. ‘양’은 해이니,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한가운데에 그려진 진홍색 동그라미만 떠올려 보아도 의당히 일본의 상징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비록 귀화한 몸이었지만 마음마저 완전히 귀화가 되지는 못하였던가 보다. 떠나온 고향 산천, 두고 온 부모 형제, 밤이면 밤마다 눈에 밟히는 고국 땅과 가족이 그리워 전전반측하며 지새운 나날들이 그 얼마였을까. 인간적인 동정심에 연민의 마음이 인다.
가창 우미산 드날머리에 자리한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찾았다. 원래 일본 장수로서 임진왜란 때에 참전하였다가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金忠善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김충선, 그는 충신인가 역적인가. 우리의 입장으로 보면 당연히 다시없을 충신이지만, 일본의 입장으로 살피면 천하의 대역적이 아닌가.
장군의 본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우선봉장으로 출정을 한다. 하지만 임란에 대해 의롭지 못한 전쟁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동료를 버리고, 국가를 버리고 그리고 명예까지 포기하면서 귀화하여 마침내 조선 사람이 된다. 그 갸륵한 뜻을 기려 선조가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와 함께 내려준 이름이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충선이다.
그는 조선에 조총 제작 방법과 화약 제조기술을 전수하는가 하면 직접 조총 부대를 조직하는 등 맹활약을 펼친다. 게다가 일본의 우두머리 장수였으니 왜군의 전술 전법이며 병참 같은 중요한 정보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장군의 귀화가 조선 군영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큰 힘을 실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때까지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전세는 그의 귀화를 계기로 완전히 뒤집힌다. 그리하여 그는 임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끄는 데 일등 공신이 된다. 조선으로 보면 만고의 충신인 셈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따지면 이야기는 백팔십도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본으로서는 임란을 패망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반역자였던 까닭이다. 왜군들은 전투에서 쓰러져 가는 동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의 배신이 더욱 증오스러웠으리라. 그 역시 몰려오는 침략군에 맞서 동족인 일본 무사들의 목을 쳐야 했으니 참담하였을 심경이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그가 남긴 시를 통해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얼마나 고뇌가 깊었는지 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나라에 불충하고 가문에 불행을 끼쳤으니
이 세상에 가장 못난 죄인은 다름 아닌 나
필시 최악의 보기 드문 운명은 나뿐인가 하노라.
그가 이처럼 심하게 가슴앓이를 한 것은 배신자라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 그의 가슴을 더욱 괴롭혔는지도 모른다.
지난 백 년 동안 한국 천주교에서는 우리의 독립투사인 안중근 의사를 두고 ‘살인자’라고 불렀다. 그것도 어릴 때부터 가톨릭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신자를. 그러다가 세간의 비판이 심해지자 근래에 와서야 명동대성당에서 교구 차원의 공식적인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를 봉헌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친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 의사는 분명히 살인자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살인이고,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으니 사람을 죽인 것 자체는 그 누구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할 명명백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사에는 정서라는 게 있지 않은가. 사람을 죽였으면 덮어놓고 다 똑같은 살인이란 말인가. 법 조목에서조차 정당방위 규정이 존재하거늘, 그들은 그동안 어찌 그리도 몰인정하고 융통성이 없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평화를 짓밟은 일제에 맞서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살신성인의 행위를 두고 살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되지 못할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훗날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만민을 구제하기 위한 자기희생의 거룩한 투쟁이었다고 고쳐 의미를 부여했다. 비로소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뒤틀린 시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것이 비단 천주교 하나에 국한된 문제일까. 어느 특정 종교만의 현안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 자체가 지닌 자기모순에서 연유된 결과 아닐까. 모르긴 해도, 우리의 전통 종교인 불교 역시 교리와 실천 사이의 가치 충돌 문제에 대해 고심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같은 종교적 자기모순에서 빠져나올 구멍이 필요했고, 그러한 고심 끝에 마련된 장치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가운데 하나인 살생유택殺生有擇일 터이다.
살생유택, 곧 함부로 산 것을 죽여서는 아니 되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서라면 살생은 하되 가려서 행하라는 가르침 아닌가. 이 조목을 계율로 적시해 둠으로써 의로운 살생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수행자이기에 번연히 보고도 그냥 팔짱만 끼고 있어야 옳은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는 비겁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김충선 장군에 대한 평가 역시 이러한 일련의 논리 위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객관적인 시각으로 살피면 그는 대반역자임이 분명하다.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그것도 적국에 귀중한 정보를 팔아넘긴 중죄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군은 명분 없는 전쟁의 부당성을 혐오하고 평화를 지향한 박애주의자였다. 장군의 이러한 사상이 뒤늦게야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됨으로써, 처음엔 장군을 배신자로 몰아세웠던 일본인들마저 사백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장군의 흔적을 찾아 숭모의 예를 표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해석이라고 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다. 충신과 역적은 손바닥의 앞뒷면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항시 승자의 편에 선다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입장에서 기술되게 마련이다. 우리 편에 붙으면 충신이 되지만 반대편에 붙으면 역적으로 바뀐다. 한 집안의 형제자매 가운데도 부모에게 잘하는 자식이 있고 못하는 자식이 있듯이 한 나라, 한 민족 안에서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어느 가족 혹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며 싸잡아 욕을 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지금 우록友鹿에는 김충선 장군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장군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우러러 받들 것임이 틀림없다. 아니, 장군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 나라, 이 아름다운 강토에서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살이의 의미를 여기 녹동서원에 와서 다시금 되뇌어 본다. 옳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조국마저 버린 장군의 삶의 자세를 헤아리며 영정 앞에 옷깃 여민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