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 칼럼] 『난중일기』에 나타나는 봉수 제도

윤헌식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이 여수 전라좌수영 뒷산인 종고산의 북봉(北峯) 연대(煙臺)를 둘러본 일은 꽤 유명한 일화이다. 연대는 비상시 횃불이나 연기를 올리기 위해 축조한 높이 3m 내외의 토축, 석축 또는 이 둘을 혼합한 인공적인 시설물로서, 조선시대 봉수(烽燧) 시설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였다. 아래는 『난중일기』의 북봉 연대 관련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4일

 

동헌에 나가서 업무를 본 뒤에 북봉의 연대 쌓는 곳으로 올라갔다. 쌓은 곳이 매우 잘되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봉수가 열심히 일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위 기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봉수의 설치나 관리가 본래 수군절도사인 이순신의 책임 아래에 있는 업무인가? 조선시대 봉수 제도를 다룬 연구서나 논문을 찾아보면, 그 숫자와 분량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쉽지 않은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봉수 제도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상당히 많은 변화를 거친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아마도 관련 학자들조차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필자는 관련 연구서를 통해 해답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우선 『중종실록』의 기사(42권, 중종16년-1521년 8월12일 신묘 2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왕이 관찰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에게 유서를 내려 봉수의 설치를 명령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경국대전』의 「병전」-「봉수(烽燧)」에 따르면 지방의 봉수는 각 진영의 장수에게 보고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봉수의 설치나 관리의 책임 주체는 시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하였기 때문에, 『중종실록』의 기사와 『경국대전』의 법령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지를 파악하려면 상당히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단, 『중종실록』과 『경국대전』의 내용을 통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북봉 연대를 쌓은 일이 조선의 봉수 제도 안에서 이루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 보이는 봉수는 북봉 연대뿐이 아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2월 19일부터 27일까지 약 9일 동안 충무공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소속의 진포(鎭浦) 5곳을 순시하는데, 그 경로가 전라좌수영 경내 봉수가 있는 곳을 대부분 거쳐 지나가고 있다. 아래는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1. 『난중일기』 1592년 2월 19일

순시를 떠나 백야곶(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최남단의 곶)의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순천부사(권준)이 그의 동생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기생도 왔다. 비가 온 뒤에 산꽃이 활짝 피어나 그 경치의 뛰어남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저물녘에 이목구미(여수시 화양면 이목리)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도로 가니 영주(흥양)현감(배흥립)과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권관(김인영)이 나와서 맞았다.

 

☞ 백야곶 근처에는 백야곶봉수(여수시 화양면 장수리 봉화산)가 있다.

 

2. 『난중일기』 1592년 2월 22일

아침에 업무를 본 뒤에 녹도(녹도진-고흥군 도양읍 용정리)로 갔다. 황숙도(황승헌)도 함께 갔다. 먼저 흥양의 전선소에 들려서 직접 배와 온갖 물품들을 점검한 다음 녹도로 갔다. 새로 쌓은 봉우리 위의 문루로 바로 올라가니 경치의 뛰어남이 경내에서 으뜸이었다.

 

☞ 녹도진으로 가는 길 옆에는 장기산봉수(고흥군 도양읍 용정리 장계산)가 있다.

 

 

3. 『난중일기』 1592년 2월 24일

 

가랑비가 온 산에 가득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마북산(고흥군 포두면 마복산-지금도 종종 마북산으로 불린다.) 부근 사량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노를 재촉하여 사도(사도만호진-고흥군 영남면 금사리)에 이르니 흥양현감(배흥립)도 이미 와 있었다.

 

☞ 마복산에는 마북산봉수(고흥군 포두면 차동리 마복산)가 있다.

 

[마북산봉수 - 자료 출처: 김주홍, 2010, 『조선시대의 연변봉수』]

 

4. 『난중일기』 1592년 2월 27일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봉(여순시 돌산읍 금봉리 천왕산)에 올라 형세를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이 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라 사방으로 적이 들어올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아주 허술하여 매우 걱정스러웠다. 첨사(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진력을 다했지만 미처 손을 쓰지 못했으니 어찌하는가?

 

☞ 방답진 북봉 근처에는 돌산도봉수(여수시 돌산읍 둔전리 봉수산)가 있다.

 

​위 『난중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순시 경로가 봉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야곶봉수와 마북산봉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2월 19일 충무공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서 배를 타고 곧장 여도로 가지 않고 굳이 백야곶 봉수가 가까이에 있는 백야곶을 들렸다가 여도로 갔다. 2월 24일에는 사도로 가는데, 굳이 걸어서 마북산봉수가 있는 마북산 부근까지 갔다가 그 다음에 배를 타고 갔다.

 

위에서 언급한 백야곶봉수, 장기산봉수, 마북산봉수, 돌산도봉수를 포함하여 천등산봉수(고흥군 풍양면 송정리 천등산)까지 총 5개의 봉수는 당시 전라좌수영 경내에 있었던 직봉(直烽) 봉수이다. 직봉 봉수는 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5개의 간선로 상에 위치한 봉수이다. 그 외에 직봉과 직봉을 연결하여 주거나 변경에서 본진(本鎭)이나 본읍(本邑)을 연결하여 주는 봉수는 간봉(間烽) 봉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종고산의 북봉 연대는 간봉 봉수에 속한다. 직봉 봉수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관에서 편찬한 지리지에도 수록될 정도로 중요한 국가적 통신 수단이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봉수 관련 내용은 충무공 이순신 개인의 일상 기록을 넘어 조선시대의 봉수제도 운영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김주홍, 2010, 『조선시대의 연변봉수』, 한국학술정보

김주홍, 2011,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2.09 10:18 수정 2024.02.09 10:20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대청의 그거 왜 해?
광주루프탑카페 숲안에 문화복합공간 #로컬비즈니스탐험대 #우산동카페 #광주..
2025년 4월 25일
2025년 4월 25일
전염이 잘 되는 눈병! 유행성 각결막염!! #shorts #쇼츠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