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이순신 장군의 견내량 차단 작전과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개막

이봉수

이순신 장군이 7차에 걸친 웅포해전에서 승리하고 여수로 복귀해 있을 때인 1593년 4월 9일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 강화협상이 타결되었다. 4월 19일부터 일본군은 전면 퇴각을 시작했고, 권율과 명나라 이여송의 조명연합군은 서울로 입성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5월 2일 여수에서 선전관 이춘영이 갖고 온 유서를 받았는데, 도망가는 적을 무찌르라는 내용이었다. 5월 7일 오전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다시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했다. 남해도의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미조리)에 이르자 샛바람이 불고 파도가 산더미 같아 나아갈 수 없어 거기서 밤을 지냈다.

 

8일 새벽에 미조항을 출발한 이순신은 사량(통영시 산양읍 사량면 진촌리)에 이르러 사량만호 이여념을 만났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창신도(창선도)에 있는데 군사가 모이지 않아 배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바로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당포 마을)로 가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을 만나고 밤을 지냈다. 9일에는 걸망포(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신봉 마을 걸망개)까지 진출했다. 저녁에 원균이 2척의 전선을 끌고 왔다.

 

10일 아침 일찍 걸망포를 출발한 이순신 연합함대는 견내량으로 진출했다. 이곳에서 선전관 고세충이 갖고 온 유지를 받았는데, 전선과 수군을 부산 근처에 집결해 놓았다가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과 협력하여 돌아가는 적을 토벌하라는 내용이었다. 11일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에서 적을 정탐하던 사람들이 돌아와 가덕 바깥 바다에 적선 200여 척이 정박하여 드나들고 있으며 웅천도 여전하다는 정보를 전했다.

 

견내량 /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의 길고 좁은 협수로

 

당시 이순신 장군은 영등포와 대금산으로 망군을 내보내어 계속 적정을 수집하고 있었다. 영등포는 거제도 내만을 지나 견내량 쪽으로 진출하는 적을 감시할 수 있는 곳이고, 대금산은 옥포를 경유하여 거제도 남단으로 진출하는 적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다. 21일에는 거제도 앞바다의 유자도(거제시 장평동 귤도)로 옮겨 머물다가 22일 오후에는 칠천량으로 옮겼다. 귤도와 칠천량은 비바람이 치는 날 함대가 정박하기 좋은 곳이다.
 

이 즈음 이순신 장군의 심사는 아주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 사정도 모르는 조정은 급히 부산으로 가서 도망가는 적을 치라고 했지만 부산으로 가는 길목인 웅천과 가덕 등지에는 남해안으로 내려온 적세가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원균의 횡포와 주사는 날이 갈수록 더하고, 육군과의 합동작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강화협상을 주도한 명나라 관리들이 수시로 이순신 진영으로 찾아왔지만 이들은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해상에서 이들 명나라 관리들을 접대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고독한 현장 사령관 이순신의 심사가 1593년 5월 13일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바다의 달빛 배에 가득한데, 온갖 근심 치밀어 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어서야 선잠이 들었다(海月滿船 獨坐轉展 百憂攻中 寢不能寐 鷄鳴假寐)"

 

6월로 접어들면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수시로 세포(한산도 관암 마을)와 망하응포(하포 마을이라는 설이 있음) 등지를 드나들면서, 견내량에 적이 나타나면 즉시 추격하여 적을 쫓아내기를 반복했다. 6월 24일에는 영등포와 대금산 망군들이 적선 500여 척이 송진포로 몰려들었고 선봉은 칠천량에 이르렀다는 정보를 전해왔다.

 

7월에는 적들이 더욱 공세적으로 견내량을 돌파하고자 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걸망포를 모항으로 하여 견내량에 출몰하는 적을 격퇴했다. 이 시기에 이미 한산도에서 전선을 건조하여 걸망포로 끌고 온 기록도 있다. 6월과 7월 사이 견내량 일대에서 있었던 수 차례의 추격전을 두고 견내량해전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적선을 격파하는 등의 물리적인 전과는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온 왜적들은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진주성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구축하여 오래 머물며 농성할 태세를 취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계략을 간파하고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조선수군이 취할 수 있는 대책은 견내량을 차단하는 것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1593년 7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호남지방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책으로 있습니다"라고 했다.

 

손자병법에서 한 사람의 사내가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 명의 적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의 관문 견내량을 차단하여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고자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를 수군기지로 낙점했다.

 

한산도 

 

한산도는 견내량을 통과하는 적을 막을 수 있고, 혹시라도 거제도 남단을 돌아 서진해 오는 적도 즉각 대처할 수 있는 해상의 요충이다. 1593년 7월 14일 여수에서 한산도 두을포(한산도 의항 마을)로 진을 옮긴 이순신 장군은 8월 30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역사적인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4.02.12 13:51 수정 2024.02.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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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