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자에 남녀가 마주 앉았다. 연인이거나 부부 사이처럼 겉으로는 다정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서둘러 음식을 주문하더니 각자의 휴대폰을 꺼내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무 말도 없고, 아무런 눈맞춤도 없다. 만남이 공허하고 시간이 소외당하는 느낌이다. 눈만 휴대폰을 보고 있을 뿐 귀는 열어두었다고 변명하지만 실은 마음 자체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귀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마음이 없으면 들리지 않는다. 듣기 싫다고 귀가 혼자서 소리를 막거나 닫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냥 지나쳐 흘려버릴 수는 있다. 좋은 소리도 있고 때로는 들어서 아픈 소리도 있지만 말하기 싫다고 입처럼 꾹 다물 수도 없고, 보기 싫다고 눈처럼 질근 감을 수도 없다. 들으라고 있는 귀다.
인간의 청력은 동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허접하다.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남에게 말을 하는 걸 좋아해서 인간은 청력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 말만 하고 듣는 것은 소홀하니까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키고 서로 간에 불통과 불협화음을 조성하게 된다. 듣는 재주가 없으면 뱉기를 삼가면 되지만 웃자란 말과 토씨들이 항상 문제다. 듣는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들을 청(聽)은 귀 이(耳), 눈 목(目), 마음 심(心), 임금 왕(王)이 어우러진 글자다. 열린 귀와 따뜻한 눈빛, 진심으로 들으면 상대방이 나를 왕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반가사유상을 보면 귀가 크다. 사유가 곧 귀를 열어 듣는 일인 것처럼 큰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 듣는다는 일이 곧 깨달음인 모양이다.
가는귀먹은 사람처럼 언젠가부터 잘 들리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거나 실내 강연이나 공연처럼 마이크 소리에는 더더욱 대책이 없다. 마치 내가 못 알아듣도록 자기들끼리 수어를 하는 것 같고, 남들은 웃거나 반응을 보이는데 나만 혼자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마치 귓속을 텅 비우고 시간을 다 쓴 사람 같다.
소리가 작고, 말이 빠르고, 발음이 나쁘고, 사투리 때문이라고 처음에는 남 탓으로 돌렸다. 모국어가 분명한데도 언어가 되지 못하고 소리뿐인 것을 뒤늦게 알고서야 내 귀가 어두워진 것을 알았다. 죽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이 청력이라던데 정작 허공이 되어 귓바퀴를 맴도는 소리가 아쉽기만 하다. 나이 들면 우주의 섭리처럼 곱고 편하게 사는 법이라며 그냥 안경 쓰고 좋은 책 읽고 풍경이나 즐기자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허전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한편으론 귀가 안쓰럽기도 하다. 세상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주파수를 맞추느라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을까 싶다. 지난한 삶에 넘어지지 않도록 평형감각을 유지하느라 또한 얼마나 긴장하고 살았을까. 고막 하나에 온몸을 의지하고 버텨온 삶에 일찌감치 창을 닫고 탈출구를 찾아간 모양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소리를 키우고 으르릉거렸다. 남을 위로하고 힘이 되는 따뜻한 소리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한낱 소음이나 엇박자가 되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차라리 듣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마음의 상처로 굳어져 짙은 그늘이 된 말들,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허튼소리를 두고 뒤늦게 후회할 수도 없는 일이다. 소리를 소리로만 들었을 뿐 그 뜻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싫은 것이 많은 세상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이 가청음역 밖의 메아리가 되었다. 사오정처럼 못 들은 체하거나, 무슨 말인지 모르는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진정 상대방의 처지나 속마음을 헤아려보기는커녕 때로는 귀찮아서 듣기 싫어하거나, 무슨 해나 될까 봐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나 않았을까 싶다. 내 귀는 불통의 난청(難聽) 지역이 되어 마음 밖으로 듣느라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듣는 것도 차별과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의 말은 사랑 이야기에 목마른 필경사처럼 귀를 바짝 기울였다. 고개도 끄덕이고 쉽게 동조도 했다. 하지만 부모나 아내, 자식들처럼 가족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그저 내 말이 먼저이며, 내 주장과 명분을 드러내기에 바빴다. 정작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는 것이 지금 와서 미안하고 안타깝다. 간사한 것은 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귀가 안 좋은 탓인지 자꾸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을 선호하게 된다. 더구나 세상은 이모티콘 같은 그림말이 만국 공통어처럼 통용되는 시대다. 문자와 기호로 사람의 생각과 표정, 감정과 의사를 표현하는 귀가 필요 없는 언어이다. 바로 옆 동료끼리도 문자로 주고받고, 슬프고 기쁜 일도 멀찌감치서 메신저가 대신한다. 목소리 대신 한 번의 클릭으로 나의 언어를 쉽고 편리하게 전달할 수 있으니 듣는 일이 자꾸만 멀어져간다. 목소리의 온기와 향기가 그립다.
어느 시인은 나이가 들고서야, 힘이 빠지고서야, 이별을 경험하고서야 겸손한 귀를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귀뚜라미 소리가 선명해지고, 달이 뜬 것처럼 소리의 모양이 둥글어지고, 창밖 풍경을 듣는 귀의 자세가 순해졌다고 한다. 경쟁과 다툼, 욕심과 집착에서 가벼워진 모양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일 뿐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마음의 귀(耳)를 먼저 열어야겠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