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칼럼] 디카시야, 현실 설명에서 벗어나자

신기용

1. 들어가기

최근 우리나라 인터넷 공간에서 ‘사진시(寫眞詩)’, ‘시사진(詩寫眞)’ ‘디카시(digital camera詩)’, ‘디지털시(digital詩)’, ‘포토 포엠(photo poem)’ 따위의 꼬리표를 단 시의 소비가 늘어 가는 추세이다. 웹툰(Webtoon), 웹 소설(Web Novel), 앱 소설(App Novel)만큼의 인기는 아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디지털 사진과 함께 5행 이내 짧은 시, 즉 디카시의 인기가 상승 추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 디카시의 소비는 SNS, 밴드, 카톡, 블로그, 카페 따위의 모바일(mobile, 정보통신의 이동성)로 이루어진다. 즉, 손바닥의 휴대폰이나 태블릿 PC를 통해 소비가 이루어진다. 창작과 독서 소비가 디지털 공간에서 실시간 이루어진다. 

 

전통적 종이책 독서 방식인 디카시집으로 소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디카시 전문 문예지도 있다. 지면의 일부를 할애하는 문예지도 있다. 종이책으로도 디카시 소비가 이루어진다. 이는 태생적 목적, 기능과 거리가 먼 괴리 현상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창작하고, 소비한 뒤, 다시 종이책으로 인쇄하여 소비한다는 점은 태생적 본령과는 거리가 멀다. 모순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디카시 확장 네트워크의 생태 구축이 연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 디카시 개념 체계 이해

먼저 《우리말샘》의 표제어를 중심으로 개념을 살펴본다. 디카시는 사진시의 하위 체계이다. 사진시(寫眞詩)란, “사진을 활용하여 창작하는 시. 대표적으로 디카시가 있다.” 디카시(digital camera詩)란,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한 시.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로, 언어 예술이라는 기존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 예술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카시집은 디카시를 창안하고 실험을 시도한 이상옥 시인의 『고성가도』(문학의전당, 2004)이다.

 

디카시와 개념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용어를 살펴본다. 시사진(詩寫眞)이란, “표현하고자 하는 감흥에 어울리는 사진을 함께 엮은 시”이다. 디지털시(digital詩)란, “조형물이나 퍼포먼스를 동원하고 각종 전자 기기의 음향과 미디어 기기를 활용하는 실험적인 시.”이다. 포토 포엠(photo poem)이란, “표현하고자 하는 감흥에 어울리는 사진을 함께 엮은 시.”이다. 

 

대표적인 디카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현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탈경계 측면에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문제이다. 사진과 5행 이내의 짧은 시와 융합 측면에서 시도할 수 있는 문제이다. 창시자 이상옥 시인이 포토 포엠은 사진과 시가 각각의 독립성을 유지한 융합의 개념이지만, 디카시는 사진과 시의 ‘동체’(『앙코르 디카시』, 20쪽.)라고 주장한다.

 

디카시 발표는 등단 절차를 밟은 시인이든 비전문가이든 창작할 수 있다. 시와 사진의 상호 보충 설명 형식이라서 대체로 질 낮은 산문 형식을 취한다. 특히 명성이 높은 시인이 발표한 디카시도 낮은 단계의 시 수준이다. 그래서 대중문화 현상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언어 예술인 시 갈래로 인정받기에는 한계가 있다. 

 

모바일을 통한 창작과 읽기를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다. 그래서 웹 소설(Web Novel)이나 웹툰(Webtoon)처럼 자연스럽게 모바일로 창작하고 소비한다. 웹 소설과 웹툰은 이미 젊은 애독자가 두텁게 소비 계층을 형성했다. 디카시의 향유층은 젊은이도 있지만, 노년층이 많다.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원의 대부분은 중년과 노년층이다. 

 

디카시는 정통 시단의 시선에서 보면, “사실(事實)과 현실을 기록한 사진을 설명하는 산문의 글에 시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사진 자체가 현실이므로 문자는 설명하는 기능에 그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설명하는 사족에 불과하다. ‘디카 에세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몇몇 신문사 신춘문예에서 ‘디카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공모하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문학 이론가들이 디카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문학평론가 김관식은 디카시 붐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읽어 본다.

 

디카시는 일본의 하이쿠 시를 모방한 시이다. 하이쿠가 이미지를 중심으로 상상력을 확장시켜 주는 반면, 디카시는 사진이 곁들어져 있어 사진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 놀이를 즐겨하는 한국의 문학풍토에서 디카시는 문학보다는 문학 향유자들이 문학을 빙자하여 문학인처럼 위장하여 남에게 자신을 돋보이려는 명리적 가치 실현을 하기 위한 놀이 문화이다. 시적 능력이 없는 글을 사진으로 위장하여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려는 한국적 문학 병리 현상에 불과하다.

 

여러 비판적 시각이 있지만, 생략한다. 언제 어디서든 창작하고 읽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장점도 있다. 디카시 향유층인 중년과 노년층에게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다는 지점은 매우 매력적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일상의 자투리 시간에도 손바닥 안에서 창작하거나 소비할 수 있다. 우리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디카시의 경우 사진작가의 시선(예술 사진작가라는 의미가 아님.)과 시인의 시선을 동시에 드러낸다. 사실을 기록한 사진, 즉 현실을 기록한 사진의 시각적 심상과 시의 시각적 심상이 하나의 텍스트로 만난다. 사진의 시선과 시의 시선이 결합한 동체이다. 현대 문화의 현상인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융합’ 차원을 넘어 사진과 언어 예술이 상호 작용하는 하나의 동체라는 점에 주목해 본다. 문화 현상 측면에서 사진의 시선과 시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심상을 만들어 낸다. 대부분 시각적 심상에 그친다. 

 

사진의 속성은 사실 기록, 현실 기록이다. 시각적 심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시각적 심상의 현실을 설명하는 글 수준이라는 지점이 디카시의 한계이다. 오감을 통한 감각적 심상뿐만 아니라, 비유적, 상징적 심상으로 확장해 나가지 못함이 아쉬운 지점이다. 

 

3. 사진과 문학의 융합 역사

사진과 시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편집 방식은 영상 문학 편집과 닮은 점도 많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문학과 사진이 함께 결합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조르주 로덴바흐(Geores Rodenbach)의 소설 『죽음의 도시 브뤼주(Bruges–la–Morte)』(1892)이다. 벨기에 출신인 로덴바흐는 소설 작품에 35장의 사진을 편집하여 죽음의 도시 브뤼주를 설명하는 문학적 도구로 사용하였다. 독일에서 최초로 사진을 문학적 도구로 활용한 작품은 1929년에 출판된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의 『독일, 독일 만세』이다. 그래서 투홀스키는 ‘사진 텍스트’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탄생시켜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설가 조세희의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열화당, 1985)에서 산문과 사진, 박남철의 『반시대적 고찰』(도서출판 겨레, 1988)에서 시와 사진을 함께 편집한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앞의 두 책은 그 당시 매우 생소하고 충격적인 낯선 편집 형태였다. 사회 고발적 내용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 후 사진작가이기도 한 신현림 시인이 영상 에세이집 『나의 아름다운 창』(창작과비평사, 1998)과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책읽는오두막, 2014)에서 수준 높은 사진에 시와 에세이를 함께 편집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사진과 산문의 만남은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감상해야 할 사진을 설명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시와 사진의 만남을 실험한 박남철 시인은 탈경계, 낯설게하기 기법 측면에서 한국적 해체시로 인정받았다.

 

4. 국어 교과서에 실린 디카시

오마이뉴스(2018. 1. 25.)는 교과서에 처음으로 수록한 디카시를 소개했다. 사진 하단에 ‘창비’에서 출간한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중1 시>에 실린 서동균 시인의 디카시 “봄”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결행 “초록 햇살을 품고 가는 애벌레야”라는 공감각적 심상(시각+촉각, 품고를 촉각 심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만으로도 설명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설명조 산문에서 벗어난 디카 동시(童詩)이다. 누구든 이에 버금가는 디카시를 창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서동균의 디카시도 사진을 설명하는 산문이 꽤 많다.

 

현재 진행형인 디카시는 생활 문학(生活文學)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을 소재로 한 문학.”(《우리말샘》)이다. 대체로 ‘시 놀이’, ‘문학 놀이’라는 ‘유희‘에 그치는 수준이다. 시의 유희 기능만 확연히 드러난다. 디카시 운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아 가는 중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5. 디카시 창작론

디카시가 시각적 심상의 현실 기록인 사진과 시가 상호 보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디카 산문(에세이)’이라는 말은 성립한다. 디카시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해결해야 할 요소가 많다. 대표적인 요소가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이다. 디카시가 설명조의 짧은 산문 수준에 그친다는 지점에 주목해 본다. 

 

설명하는 시는 죽은 시다. 그런 측면에서 디카시의 사진은 그 자체가 시각적 설명이다. 시는 사진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친다. 정통 시에서 설명하는 시는 죽은 시이다.

 

설명하는 사진도 죽은 사진이다. 사진은 현실 기록이다. 정지한 사진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반전의 장치가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시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는 순간 죽은 사진이다. 

 

시에 현실 기록인 시각적 심상의 사진으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시인이 시를 설명하려 들면 스스로 작품성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시는 있는 그대로 두어야 깊은 맛이 난다. 백 사람이 읽으면 백 가지의 해석이 나와야 시다운 시이다. 사진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현실 기록을 마주한 상호 설명 때문에 하나의 해석에 그치고 만다. 즉, 디카시는 껍데기만 시이다. 죽은 시이다. 현실에 설명을 덧붙인 산문이다.

 

창시자 이상옥 시인과 김종회 문학평론가가 주장하는 디카시 창작론의 일부만 읽어 본다.

 

나는 자연이나 사물, 사건에 깃들인 시의 형상(극순간적 감동의 형상)을 날시(raw poem)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디카시는 날시의 포착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즉, 날시(raw poem)를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것이 시 창작의 단초다.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한 날시는 여전히 침묵하는 언어인데, 시인이 그 침묵의 언어를 듣고 옮겨 놓으면 디카시는 완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디카시는 날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라고 정의한 것이다.

― 이상옥, 『앙코르 디카시』, 19쪽.

 

시인이 영감으로 포착한 현실 자체를 ‘날시’(그렇다고 모든 현실이 날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로 보고 그것을 육화하듯이 언어로 옮겨 놓는다.

― 이상옥, 『앙코르 디카시』, 15-16쪽.

 

디카시는 시인의 창작 역량과 노력에, 영감(靈感)을 더하고 섬광(閃光)의 시간이 함께 작동하는 예술 형식이다. 

― 김종회,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쓰다』, 64쪽.

 

이상옥 시인은 “자연이나 사물, 사건에 깃들인 시의 형상을 날시(raw poem)”라고 명명한다. ‘날시’를 “극순간적 감동의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디카시 창작은 ‘날시’의 포착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이 ‘날시’를 “시인의 영감으로 포착한 현실”이라며 ‘영감’을 강조한다. 김종회 문학평론가도 “디카시는 시인의 창작 역량과 노력에, 영감(靈感)을 더하고”라며 ‘영감’을 강조한다. 명성 높은 두 이론가가 주장하는 ‘영감’이 디카시에서 가당키나 한 말일까?

 

디카시 창작론이 ‘영감’에 의존한다는 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 지점은 ‘순수 직관’이다. 순수 직관을 영감으로 둔갑시켜 주장하는 디카시 창작론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순수 직관적 사유의 산물, 형상적 사유의 산물을 영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보편타당한 시각이 아니다. 이런 말은 허술한 이론으로 무장한 현장 비평가들도 하지 않는다.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 제도권 대학에서 교수였던 두 강단 이론가의 주장치고는 깃털처럼 가볍다. 디카시 창작론 자체가 학술적 근거가 궁핍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예 창작에서 이미 퇴물인 영감설을 내세운 디카시 창작론은 설득력이 없다. 학술적 줄기와 뿌리가 빈곤해도 너무 빈곤하다.

 

또한, 김종회 문학평론가가 강조한 “시인의 창작 역량과 노력에, 영감(靈感)을 더하고”라는 대목은 시인 개별자의 ‘문학 능력(literary competence)’의 ‘내면화’ 구조 체계 문제이기도 하다. 즉, ‘영감’의 작동이 아니고. ‘내면화’ 작동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영감’은 적확한 용어가 아니다.

 

이 지점은 영감설을 추종하는 비뚤어진 일부 기독교인이나 무속인들처럼 다룰 사안이 아니다. 이론가가 말장난으로 언급할 문제도 아니다. 학술적 이론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무겁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이 사안만 보더라도 디카시 창작론 자체가 말장난에 불과하다.

 

시상 포착 단계인 ‘날시’는 그림으로 말하면 스케치 형상, 글로 말하면 메모 형상이다. 이를 영감이라고 한다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이는 형상적 사유의 산물이다. 순수 직관적 사유의 산물이다. 이를 사진으로 찍는다. 이때 사진은 순수 직관적 산물이다. 이를 다시 감각과 감정을 이입하여 문자로 재현한다. 이 역시 형상적 사유의 산물이다. 이들이 ‘영감’이라고 주장한 지점의 현상학적, 인식론적 오류는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디카시 창작론을 가스통 바슐라르의 상상력 측면에서 보면, 지각이나 기억에만 관련된 재생적 상상력 영역에도 미치지 못해 이를 제대로 촉발하지 못한다. 시의 본령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실재나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창조적 상상력의 단계까지 확장해 나가야 한다. 디카시 창작론 인용문만 보더라도 디카시는 산문이라서 상상력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주목해야 한다. 디카시 창작론의 다른 부분을 읽어 본다.

 

디카시는 현실 속에서 시적 형상을 (극)순간 포착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의미의 창작자로서 시인의 개념보다는 에이전트로서 선택자나 포착자라는 개념이 우세하다. 소위 랭보가 말한 견자로서의 시인이라고 보아도 좋다. 어떻든 디카시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시적 형상을 극순간 포착하여 그것을 사진과 문자인 멀티 언어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기존 시의 개념과 다른 국면이다.

 

(……) 기존의 경우에는 창작의 주체는 시인이고, 시의 대상인 현실(사물)은 객체다. 그런데 디카시는 현실이 주체가 되고, 시인이 객체가 된다는 점이다.

― 이상옥, 『앙코르 디카시』, 17쪽.

 

디카시 창작론만 읽어 보더라도 ‘디카시’가 아니라 ‘디카 산문’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합하다. 특히 “디카시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시적 형상을 극순간 포착하여 그것을 사진과 문자인 멀티 언어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기존 시의 개념과 다른 국면이다.”라는 말은 낮은 단계의 시적 형상, 즉 산문을 의미한다. 즉, 에세이즘을 바탕으로 한 짧은 산문이다. 사진은 현실이다. 이를 보완하는 글도 현실을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설명 수준에서 한 단계 앞선 디카시를 평가하면 그나마 진술 수준이다. 표현 면에서 이를 뛰어넘어야 한다. 창안자가 한국문학도서관에 연재한 첫 작품 ‘봄밤’(2004. 4. 2.)을 읽어 본다.

 

 

인용 디카시를 김종회 문학평론가는 “어두운 전체 화면 가운데 대학 강의동의 몇몇 창틀에 불빛이 서려 있을 뿐이다. 그 어둠과 빛의 공존을 두고, 시인은 ‘얇은 속옷’의 ‘봄밤’을 떠올렸다. 아니면 그 두 개념에 캠퍼스의 야경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쓰다』, 88쪽.)라며 해설했다.

 

달리 보면, 직접 정서로 사진을 설명한 산문이다. 결행의 ‘몇몇 창들’에 주목해 본다. 위의 해설처럼 ‘몇몇 창틀’이라고 표기했다면 아무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말은 셀 수 있는 명사 뒤에 접미사인 복수 ‘-들’을 붙일 수 있다. 몇몇이 복수라서 ‘몇몇 창’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몇몇 창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시어의 긴장이 느슨하다. 2행의 “어둠이 은은히 드리워진 / 봄날의 캠퍼스”도 일본어식 피동(被動)으로 설명한 산문이다. 물론 ‘-지다’는 보조동사이다. 

 

그러나 화자가 피동의 유체 이탈 화법으로 남 이야기하듯 이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주체와 객체의 혼돈만 가중할 뿐이다. 그리고 외래어 ‘캠퍼스’보다 ‘교정’이라는 시어를 채택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시인은 우리말을 빛나게 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우리말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듯한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드리운 어둠(어둠 드리운) / 봄날의 교정”이라고 했다면 함축미와 긴장미를 동시에 획득했을 것이다. 

 

 

인용 디카시 ‘고성가도’는 이상옥 시인의 첫 디카시집의 표제시이다. 두 개의 직접 정서의 설명조 문장을 행만 갈라놓은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디카시가 아닌 디카 산문임을 증명한 시이다. 앞의 인용 디카시처럼 2행에 캠퍼스라는 외래어가 또 등장한다. ‘아랑곳하다’는 하나의 동사이다. 띄울 수 없는 단어이다. 이는 시적 자유가 아닌 오류이다. 결행에 “아직 파란 눈을 켜고 있다.”라는 현재 진행형 설명조에 주목해 본다. 우리말 시제에 현재 진행형은 없다. 굳이 국적 불명의 번역체 문장을 채택하여 시행을 느슨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시라면 당연히 시어의 긴장미, 내용의 긴장미, 행간의 긴장미를 추구해야 마땅하다. 번역체 문법의 산문을 시처럼 행을 갈라놓았다고 해서 시일 수는 없다.

 

또한, 디카시 등단자 작품을 읽어 보면, 한자 관념어 남발, 직접 정서의 설명조 남발, 외래어 남발이 도배 수준이다. 이런 점이 운문이 아닌 산문임을 증명한다. 클리셰 같다. 심지어 문장 부호 마침표마저 생략을 원칙으로 하는 표어 같기도 하다. 일부 수준 높은 디카시를 고려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이미지즘의 짧은 산문시 정도이다. 성공적인 시의 자격을 얻기 위해선 창작 기법 보완이 필요하다.

 

6. 나가기

디카시처럼 상호 보완적인 설명을 하면서 태어난 시는 죽은 시이다. 사족을 단 시이다. 미완의 시이다. 대부분 디카시는 현실을 기록한 사진의 시각적 심상과 시의 시각적 심상이 상호 보완하는 수준이다. 즉, 형상적 사유의 산물, 순수 직관적 산물에 머물러 있다. 이 지점이 아쉬운 점이다.

 

향후 표현 면에서 현실 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 진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비현실적인 공감각적 심상을 비롯한 묘사에 비중을 둬야 할 것이다. “회화나 조각의 감각을 시 형식의 텍스트로 바꾼”(《우리말샘》) 그림시(그림詩)처럼 시적 수준을 드높여야 할 것이다. 현실의 기록인 사진의 시각적 심상과 상호 보완하는 형상적 사유의 산물, 직관적 사유의 산물을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시의 심상 측면에서는 감각적, 공감각적, 비유적, 상징적 심상으로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지각이나 기억에만 관련된 재생적 상상력을 넘어 실재나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영역까지 확장해야 할 것이다. 디카시 창작론의 보완이 필요한 지점이다.

 

앞으로 수준 높은 디카시 창작이 보편화할 날이 다가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전문 시인이든 비전문가이든 디카시 창작에 한 번쯤 참여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단, 시적 수준을 늘 고투해야 할 것이다. 

 

디카시가 세계의 문화 현상으로 확산해 나갈 수 있게 노력을 아끼지 않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디카시를 창시한 이상옥 시인의 실험 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모든 창작자께서 성공적인 작품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응원한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7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

이메일 shin1004a@hanmail.net

 

작성 2024.02.21 10:54 수정 2024.02.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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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