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 칼럼] 임진왜란 시기 권관(權管)의 위상

윤헌식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임진장초』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권관(權管)'이라는 무관 벼슬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권관을 검색해 보면 '조선시대 변경지방 진관(鎭管)의 최하단위인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守將)'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다른 여러 역사 관련 사이트나 연구 자료를 찾아보면 대개 '종9품의 무관직' 또는 이와 비슷한 말로 권관을 정의하고 있다. 보통 권관을 종9품 무관직으로 보는 이유는, 1746년 영조 때 간행된 『속대전』이 권관의 품계(品階)를 종9품으로 명시하여 법제화하였기 때문이다.

 

​『속대전』이 편찬된 영조 시기는 조선 후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역사학계에서 권관의 품계를 종9품으로 보는 개념은 조선 후기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와 중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권관에 대해 언급한 역사 연구 자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권관이 종9품이라고 정의한 다음에 각자의 논지를 전개한다. 조선 후기 사료에 해당하는 『속대전』에 정의된 권관의 품계가 과연 조선 전기나 중기에 적용해도 괜찮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 전기와 중기의 권관은 종9품에 해당하는 낮은 벼슬이 아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등에는 권관의 위상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장수로서 큰 공을 세운 김인영, 김축, 변익성, 이영남은 권관을 지낸 다음 짧게는 1~2년, 길게는 3~4년 뒤에 만호(종4품), 판관(종5품), 첨사(종3품)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아무리 큰 전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종9품 벼슬에서 종5품~종3품 벼슬로 뛰어 오른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제도와 관행 아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김인영(金仁英)

『임진장초』의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1592년 7월 15일): 벼슬이 여도권관(呂島權管)으로 서술됨​

『난중일기』 1593년 2월 18일: 벼슬이 여도만호(呂島萬戶)로 서술됨

 

김축(金軸)

『임진장초』의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1592년 5월 10일): 벼슬이 평산포권관(平山浦權管)으로 서술됨

『난중일기』 1592년 8월 25일: 벼슬이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로 서술됨

 

변익성(邊翼星)

『난중일기』 1595년 11월 24일: 벼슬이 곡포권관(曲浦權管)으로 서술됨

『난중일기』 1597년  5월 26일: 벼슬이 사량만호(梁蛇萬戶)로 서술됨

 

​이영남(李英男)

『난중일기』 1594년 9월 2일: 벼슬이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으로 서술됨

『강계읍지(江界邑誌)』의 「선생안(先生案)」 : 1595년 7월~12월 강계판관(江界判官)을 지냄

『선조실록』106권, 선조31년(1598) 11월27일 무신 5번째 기사 : 벼슬이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서술됨

 

 

『명종실록』의 기사에는 이 시기 권관이 어떠한 벼슬인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명종은 선조 바로 이전의 임금이다. 따라서 이 기사에 나타나는 권관의 위상이 임진왜란 시기 권관의 위상과 거의 직결될 것이다. 아래는 그 관련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명종실록』14권, 명종8년(1553) 윤3월14일 경신 1번째 

 

지경연사 이준경(李浚慶)이 아뢰었다.

 

"만호(萬戶)와 첨사(僉使)는 마땅히 나이가 젊고 무재(武才)가 있는 출신자(出身者) 중에서 미리 선발해야 된다는 전교는 지당합니다. 나이가 젊으면 스스로 앞길이 원대하다는 것을 알고 불의(不義)의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적을 막을 때도 힘이 강한 자가 쓸 만합니다. 선조(先祖) 때부터 이 의논이 있었으나, 첨사는 3품이고 만호는 4품이어서 젊은 사람들의 자급(資級)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이런 의논이 있었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첨사와 만호를 차송(差送)하는 곳은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이라 생각되니 자급이 모자라는 나이 젊은 무신(武臣)을 권관(權管)의 칭호로 차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종조(祖宗朝)에서도 역시 승문원 저작으로 만포 권관(滿浦權管)을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명종실록』14권, 명종8년(1553) 윤3월14일 경신 3번째 기사.

 

심연원(沈連源), 상진(尙震), 윤개(尹漑), 좌참찬 임권(任權), 예조판서 정사룡(鄭士龍), 병조판서 이준경(李浚慶), 부제학 정유(鄭裕) 등이 의논드리기를, "황해도(黃海道) 9참(站)에 관군(館軍)과 정병(正兵)이 5년마다 서로 교대하여 입마(立馬)하니 일도(一道)의 군사가 모두 피로하게 되어 후일 급할 때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입마를 관군이나 정병 중 어느 한쪽으로 영구히 정한다면 사람마다 뜻이 정해져서 그 역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이 고생스러워 감당하기 어려우니 무휼(撫恤)하고 접대하는 방법을 극력 조치하여 그 절목(節目)을 병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첨사와 만호를 무재(武才)가 있는 젊은 출신(出身) 중에서 뽑아 보낸다면 사람마다 각각 제 앞날을 생각하여 백성들을 침탈하지 않을 것이고, 또 외모(外侮)도 잘 막을 것입니다. 이 의논이 종전부터 있었으나 번번이 자급(資級)이 직(職)에 맞지 않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간혹 중요한 진(鎭)과 보(堡)에 자급을 문제삼지 말고 젊은 출신을 뽑아 보내어 권관(權管)이라 일컬으면 《대전》 관명(官名)을 고치지 않더라도 일시의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위 『명종실록』의 기록을 요약하자면, 품계가 높은 만호나 첨사가 부임하는 관방의 중요한 자리에 젊은 인재를 권관이라는 벼슬을 주어서 부임시키자는 내용이다. 비록 여기에 권관의 품계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만호나 첨사를 대신할 정도의 능력 있는 인물을 채용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마련된 벼슬이므로 종9품의 신출내기 무관이 갈 수 있는 자리라고 보기 어렵다. 이 기사의 내용에 비추어보면 앞에서 살펴본 임진왜란 시기 김인영, 김축, 변익성, 이영남의 사례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임진왜란 시기 권관의 위상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료를 한 가지 더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영암 밀양박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1593년에 박광춘(朴光春)에게 내려진 고신교지(告身敎旨)는, 군공에 대한 포상으로 박광춘을 창신교위훈련원판관겸삼천진권관(彰信校尉訓鍊院判官兼三千鎭權官)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

 

[박광춘 고신교지(1593년) - 자료 출처: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

위 교지는 훈련원주부(종6품) 박광춘의 품계를 창신교위로, 벼슬을 훈련원판관과 삼천진권관을 겸하여 제수하는 문서이다. 창신교위는 종5품 무신(武臣) 품계이며, 훈련원판관은 종5품 벼슬이다. 종5품과 종9품은 8단계의 커다란 품계 차이가 있다. 함께 제수된 삼천진권관의 위상이 종9품이나 그와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는 설명은 필요 없는 사족에 불과할 것 같다.

 

​권관 벼슬은 명종 이전 『세종실록』 등의 조선 초기 사료에도 등장한다. 이 시기 권관의 위상은 보다 자세한 연구가 필요한 주제이므로 본 글에서 다루지 못함을 독자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2.23 11:14 수정 2024.02.2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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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