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마음의 나침반을 따라가다

허정진

혼술·혼밥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그리 불편해하지 않는다. 어떻게 혼자서 술 마시고, 혼자서 밥 먹느냐고 친구가 의아해한다. 자기는 집은 물론 술집에서도 절대 혼자서 술 마시는 법이 없고, 밥도 식당은 물론 집에서도 혼자 먹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부러워야 당연한데 별반 그렇지가 않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잘못된 사람인가, 그래서 출세를 못 하는 건지 가끔 생각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혼자서 술 마시고 밥 먹으면서 공상도 하고, 느끼고, 결심도 하고, 내 코드에 맞춰 슬며시 웃어보기도 하는 그런 시간이 편하고 즐거운 것도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혼자 놀기에 습관이 든 때문인지도 모른다. 형제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다소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이었던 탓이다. 사내대장부가 바깥에 나가서 친구들과 들차게 놀지 않고 집안에서만 뱅뱅 돈다고 아버지가 불만이셨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결코 외롭지도, 슬프지도, 고독하지도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성품에는 본바탕이 있어 지금 어떤 모습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본성으로 회귀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인 적도 없다. 함께 있어도 소통하지 못하고 겉으로 흥만 가지고 너나들이하는 친구보다 가능하면 진중한 인간관계를 원했을 뿐이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흥정을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만부지망(萬夫之望)보다 차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을 택했다.

 

나이가 들었다. 그럴수록 남들과 폭넓게 어울려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데 오히려 그러지 않아도 되는 나이여서 더 좋다. 먹고사느라 채근당하며 쫓아가야 했던 일들, 힘들고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참아야 했던 사람들, 완벽을 위한 부담감에 밤을 지새우며 나를 구속했던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더 반가웠다. 이 세상은 아무리 착한 사람에게도 적은 있고,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추종하는 자는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부터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일이든 사람이든, 언젠가부터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고통을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내 불찰이고 그 치유도 내가 할 일이다. 용서와 화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화를 내거나 고민에 빠지는 일을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지만 즐길 수 없으면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남에게 피해나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나답고, 내가 편하고, 내게 즐거운 일만 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무욕무고(無慾無苦)라 했다. 정당한 재물이면 그만이지 큰 이득을 바라지 않으니 다툴 일이 없고, 사람에게 큰 기대를 하거나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으니 서운할 일이 없게 되었다. 편하고 풍족해야 만족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족하고 불편해도 나름대로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벗어나 상대적인 비교를 할 때 질투, 시기, 질시, 반목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인생에 똑 떨어지는 손익계산서는 없다. 얻고 잃는 것이 다반사인 세상에 쓰면 쓴 대로, 달면 단 대로 허물없이 받아들이는 여유도 필요하다. 정답도 없는 인생에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린다며 편을 가르고 줄을 세웠지만 남은 것은 서로에게 원망과 불신뿐이었다. 이해와 존중감도 없이 함부로 남의 일에 끼어들어 간섭하거나 제 방식대로 해석하고 재단하는 습관도 무례에서 나온 일이었다. 내가 기뻐야 비로소 귀가 열리고, 내가 즐거워야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도 결국 한 통속이었다.

 

자존심을 버리는 대신 자존감을 찾기로 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런 굶주림에서 해방되기로 했다.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뭘 맞춰준다는 고민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은 무력감과 상실감에서도 벗어나기로 했다.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삶이 말랑말랑해지고 당당해졌다. 아무리 좋은 향수라 할지라도 이제 내 냄새로 살기로 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잘살지는 못해도 만족스럽게는 산다. 시골 살림이 근천스럽기 짝이 없지만 마음은 더없이 온유하고 온전하다. 자기만의 시간을 온새미로 살아가는 기쁨이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여행이든, 공연 관람이든 가능하면 혼자 다닌다. 별 일없이 남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보다는 집안을 뱅뱅 돌며 혼자 노는 것도 여전히 좋아한다. 침묵한다고 단절은 아니다. 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내 영혼의 안식처이며 힘을 얻는 케렌시아다.

 

천변 산책길에 나섰다. 홀로 핀 꽃 한 송이, 냇가 바위에 혼자 올라앉은 거북이, 날개 접고 솟대처럼 홀로 서 있는 왜가리가 하나같이 평화롭고 의젓하다. 무리 짓지 않았다고 외로운 것이 아니다. 집단에서 도피한 것도 아니고 추방당한 것도 아니고, 그들 자신이 가진 본능과 방식대로 현재의 삶을 영유하고 있을 뿐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고 가장 자기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는 ‘시뮬라크르’의 시대라고 한다. 원본을 닮지 않은 복사본이라는 뜻이지만 세상에 원본 아닌 복사분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또한 누구의 대용품이나 모사품으로 살아가라는 법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고 절대적 가치를 가진 존재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내 삶이다. 혼술·혼밥도 나에게는 즐거운 일상이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그냥 내 의지대로, 내 마음의 나침반을 따라가기로 했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2.27 09:50 수정 2024.02.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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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