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잘생긴 그 남자

이순영

잘생기면 다 용서된다. 잘생기면 이유 불문하고, 장땡이다. 잘생기면 여자가 꼬이고 잘생기면 돈이 생긴다. 그렇다. 잘생기면 다다. 어른들은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고 나무라지만 얼굴이라도 뜯어먹고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여자의 마음이다. 우리말의 ‘얼굴’을 풀이해 보자면 얼이 들어있는 굴이라고 한다. 얼이 들어있는 굴인데 얼은 보이지 않는 대상이지만 굴은 보이는 대상이다. 이왕이면 그 굴이 잘생기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잘생겨야 경쟁력이 생기고 잘생겨야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건 사실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생긴 사람을 ‘얼굴깡패’라고 하고 못생긴 사람을 ‘얼굴막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잘생겨야 세상 살기 편하다는 이야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만 얼굴이 있다. 새의 얼굴이나 소의 얼굴이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마가 큰 사람은 정이 없고 이마가 작은 사람은 변덕스러우며 이마가 넓은 사람은 흥분하기 쉬우며 이마가 툭 튀어나온 사람은 성질이 급하다고 평가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소크라테스의 얼굴에서 악덕을 보았다고 얼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남겼다. 칸트나 루소도 얼굴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보면 얼굴은 보이지 않는 내면을 평가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얼굴에 진심인 것은 고대나 현대나 변함이 없다. 

 

생각해 보라. 부처님도 잘생긴 얼굴이고 예수님도 잘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악마는 생겨도 너무 못생긴 얼굴이다. 못생긴 건 기본이고 머리에 뿔이 나거나 무섭고 괴기한 얼굴이다. 한마디로 저세상 얼굴이다. 인간의 눈은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태생적으로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70년대 신성일이 잘생김의 대명사였다면 90년대 장동건은 잘생김을 넘어 바른생활 사나이의 대명사다. 요즘은 차은우의 작고 올망졸망한 얼굴이 대한민국을 대표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며 K-콘텐츠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삼천여 년 전 여자들도 잘생긴 남자에 대한 로망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잘생긴 그 남자가 

나를 문밖에서 기다리거늘

왜 아니 따라갔나 후회되네요.

 

잘생긴 그 남자가

나를 방 안에서 기다리거늘

왜 아니 따라갔나 후회되네요.

 

비단 저고리에 겉저고리 덧입고

비단 치마에 겉치마를 덧입었으니

그대여, 그대여 수레를 몰고 와 나를 데려가세요.

 

젊은 날 연애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학벌 때문에 후회하고 지역 때문에 후회하고 성격 때문에 후회하고 부모 때문에 후회한다. 후회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이 후회를 뛰어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다. 삼천여 년 전 그녀는 잘생긴 그 남자가 나를 문밖에서 기다리는 데 왜 못 따라갔는지 후회한다. 후회하고 난 뒤 비단 저고리에 겉저고리 덧입고 비단 치마에 겉치마를 덧입었으니, 수레를 몰고 와서 나를 데려가달라고 노래하고 있다. 결혼 약속을 깬 건 여자이니 아마 남자에게 돈이 없었거나 신분이 낮았거나 부모가 반대했거나 어떤 이유로 남자를 놓치고 나서 보니 후회되어 다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한다. 

 

삼천여 년 전 황하강 근처에 널리 불렸던 ‘잘생긴 그 남자’라는 시는 상사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쾌감을 준다. 동맥을 타고 흐르는 도파민이 온몸을 달구지만 현실이라는 난관 앞에 흔들리면서 사랑의 도파민은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아드레날린으로 바뀐다. 매력적인 그 남자를 선택하지 않은 여자는 오늘의 ‘나’일 수도 있다. 그 여자의 감성이 오늘의 ‘나’의 감성과 다르지 않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잘생긴 남자를 선택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다시 나를 데리려 와 주기를 고대했지만 이미 떠난 벤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다음 차를 기다리지만 벤츠 대신 모닝이 올 것이라는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삼천 년 전 그녀도 아마 나처럼 그냥 보낸 벤츠를 그리워하며 하는 수 없이 모닝을 타고 그럭저럭 살아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다 보면 잘생긴 얼굴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야흐로 인간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이 일어나며 미망에 갇혀있는 자아가 문을 열고 관념에 길들어 있던 감성적인 욕망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버리면 본질을 바라보는 냉철한 이성을 탐구하게 된다. 그렇다. 속된 말로 짝짓기가 끝나야 동물적 본성을 벗어나 비로소 인간 본질에 대한 진정한 궁금증이 일어나게 된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철학하게 되고 구도자가 아니어도 구도하게 된다. 잘생김에 대한 로망도 못생김에 대한 배척도 사라지고 오로지 인간만이 남게 된다. 

 

젊음의 특권은 상사병을 앓는 것이다. 젊을 때 잘생긴 남자, 아름다운 여자를 로망하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청춘이다. 사랑이라는 금단현상을 겪지 않는다면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지 못한다. 그저 알맹이 없이 푸석푸석 메말라 가는 쭉정이가 될지 모른다. 왜냐면 인간의 희로애락은 젊은 날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인생의 활화산 폭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삼천 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때부터 그랬고 인간이 인간일 때까지 영원할 것이다.

 

잘생긴 그 남자가 

나를 문밖에서 기다리거늘

왜 아니 따라갔나 후회되네요.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4.02.29 10:14 수정 2024.02.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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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