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정걸의 조방장 기용 배경

윤헌식

임진왜란 시기 전라좌수영 조방장(助防將)으로 활약한 정걸(丁傑)은, 칠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후세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인물이다.

 

정걸의 자는 영중(英仲), 본관은 영광(靈光), 생몰년은 1516~1597년이다.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 때 전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부산포해전, 행주대첩 등에 참전하였다. 그와 그의 아들 및 손자의 고신교지 등이 현전하는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고흥정걸가교지류고문서(高興丁傑家敎旨類古文書)로 지정되어 있다.

 

정걸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514년과 1516년의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자헌대부병마절도사정공걸유허비(資憲大夫兵馬節度使丁公傑遺墟碑)」에 보이는 1514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심수경(沈守慶, 1516~1599년)의 『견한잡록(遣閑雜錄)』과 변영청(邊永淸, 1516~1580년)의 『동호집(東湖集)』에 실린 1516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이다. 『견한잡록』과 『동호집』이 당대의 기록이므로 1516년 설이 옳을 것이다.

 

고흥군 국립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2015년에 발간된 『명장 정걸장군』에는 정걸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그의 생애와 업적, 유물, 전공 등을 상당히 심도 있게 다루었다. 아마도 정걸에 대한 정보는 지금까지 나온 연구 자료들 가운데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이 가장 수준이 높을 것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그의 출생 연도도 이 책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고흥 안동사 소장 정걸장군 영정 - 자료 출처: 『명장 정걸장군』

 

정걸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조방장으로 등장한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으로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영내 순시를 떠나 흥양현(지금의 전남 고흥군)에 이르렀을 때의 일을 적은 것이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1일

 

맑았다. 업무를 본 뒤에 주인(흥양현감 배흥립)이 자리를 베풀고 활을 쏘았다. 정 조방장(정걸)도 와서 만나고 황숙도(능성현령)도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배수립이 나와서 함께 술잔을 나누며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신홍헌으로 하여금 빚은 술을 전날 심부름하던 삼반하인들에게 나누어 마시도록 하였다.

 

[원문] 二十一日壬子 晴. 公事後 主人設席射帿. 丁助防將亦來見 黃叔度亦來同醉. 裵秀立出同盃酌甚歡 夜深而罷. 使申弘憲釀酒 分飮前日使喚三班下人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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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방장이라는 직책은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중앙에서 지역방어를 위해 파견된 무장으로서 전시를 위한 관직이다. 상설된 관직이 아닌 임시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데, 정걸이 조방장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의문스러워 보인다. 다행히 『선조실록』의 기사에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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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권22, 선조21년(1588) 4월13일 병인 2번째 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상교(上敎)에, 하삼도(下三道: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왜변(倭變)이 일어날까 염려되므로 미리 방어사를 두어야겠으니 먼저 조방장(助防將)을 보내는 일로 공사(公事)를 마련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의(李艤)가 부산첨사(釜山僉使)로 논박을 받고 아직 본진(本鎭)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곧 다시 서용하여 조방장을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위 기사의 내용을 통해 당시 조선 조정이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느끼고 미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조방장을 배치하도록 조처했음을 알 수 있다. 정걸이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배치된 것도 이러한 조정의 조처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정걸은 왜 하필 전라좌수영의 조방장으로 배치되었을까? 정걸의 고향은 전라도 흥양현(지금의 고흥군) 포두면이다. 「전라우수영선생안」에 따르면 정걸은 1587년 3월 20일부터 1589년 2월까지 전라우수사를 지냈다. 전라우수사를 지낸 뒤의 기록이 없는데, 아마 그 이후 고향인 흥양으로 물러나 있다가 위 『선조실록』에 나타난 조정의 조처에 따라 조방장으로 제수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정걸의 고향이 흥양현이었던 사실과 조정의 조처가 전라좌수영 수군에게 커다란 호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걸이 판옥선의 창제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위 『명장 정걸장군』에 실린 논고들도 이에 대하여 서로 논지의 차이가 있다. 정걸의 판옥선 창제 여부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최인선/이욱/이민웅/노영구/정해은, 2015, 『명장 정걸장군』, 고흥군/국립순천대학교박물관

해남문화원, 1989, 『해남문헌집(海南文獻集)』, 「전라우수영선생안」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3.01 10:26 수정 2024.03.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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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