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의미

홍영수

오늘날 시대적 상황은 그야말로 초 단위로 변화하는 것 같다. 급발전하는 과학의 영향력을 우리는 매 순간 실생활 속에서 겪고 있다. 몸속에 칩을 넣고, 무엇보다 통신매체의 발달로 AI 활용도가 높고, 정보의 공유 또한 빠르고 신속하다. 이토록 빠른 걸음걸이의 환경에서도 다소 곳 느리게 읊조리며 산책해야 할 이유가 있다.

 

가끔, 7층 아파트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때가 있다. 비단 필자뿐만 아니라 이웃 주민들 또한 그러하다. 버튼 한번 누르면 신속히 오르내릴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도 굳이 한 계단 두 계단을 쉬엄쉬엄 느리게 오르내리는 것은 건강을 위한 수단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 발 한 발 딛고 서는 계단에서 그 어떤 무엇을 느끼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참신한 생각이 임신 되지 않거나 두뇌가 배고플 때, 그리고 평소에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자극을 원할 때 그러하다. 

 

어느 해, 산악회에서 덕유산(향적봉 1,614m)을 등반했다. 폭설에 가까운 눈이 내려 모두 케이블카를 이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다수 회원의 의견을 수렴해서 도보 산행을 하게 되었다. 등산로 초입에서 준비운동과 함께 아이젠을 착용 후 서서히 산악 대장의 리더에 따라 등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 속에 푹푹 빠지고 등산화가 묻히는 길이기에 한 겨울인데도 두꺼운 속옷은 이미 땀에 젖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정상을 향해 갈 때 무엇보다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서는 높이만큼 저 멀리 보이는 풍경과 또 다른 세계가 올라서는 높이만큼 눈에 보이고 가슴에 안긴다는 것이다. 완만한 경사, 소위 깔딱고개라고 부르는 급경사, 그리고 바위를 감싸고 돌면서 계단을 밟고 오를 때는 순간순간이 사유의 근육과 생각의 힘줄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한 걸음씩 등산로라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을 오르는 과정은 하늘을 향한 제단의 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 이때는 몇 계단씩 뛰어오르는 비약을 결코 해서도 안 되고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 9부 능선을 오르기 위해서는 7부 능선에서 8부 능선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그것은 그만큼의 땀을 흘려야만 오를 수 있고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은 누구에게 열려 있다. 열린 그 길을 딛는 발자국에는 새로운 나가 찍히면서 또 하나의 존재론적인 전환을 맞는 계기가 된다. 그만큼 영혼의 몸집이 풍성해지고 키가 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계단이라는 길을 따라가면 등산과 하산의 사이에 단절된 무수한 공간의 계단과 계단, 걸음과 걸음 사이의 순간들이 어떤 결의를 다지게 한다. 그것은 고통과 땀의 결실들이 정상에서 서는 순간 어떤 의지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익숙함과 타성에 젖은 생각의 묵은 때와 보기 싫은 얼룩들은 수시로 빨래를 해줘야 한다. 그러한 때가 바로 엘리베이터가 아닌 느리게 올라가는 등산로와 계단 등을 천천히 오르는 때이다. 그것은 느릿느릿 걸을 때만 볼 수 있는 풍경들 앞에서 낯설게 보고, 질문할 때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인들이나, 창의적인 사람들은 결코 성전이나, 제단, 산의 정상을 오를 때 줄 하나에 매달려 오르는 케이블카나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아니다. 더 높은 곳으로의 수직 상승을 위해 시인들은 포장도로나 이기적이고 편리한 문명을 거부한다. 그래서 비포장도로나 가파른 산길, 계단을 걷고, 밟고 올라선다. 때론, 날갯짓하며 상승하는 새의 시각도 필요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거친 들판과 험준한 산맥, 사막의 길을 야생적 사고로 걸어야 할 이유도 있다. 그것은 걸으면서 마주치는 현상들 속에 새롭게 탄생하고 변모해 가는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눈보라 속 힘든 산오름 끝에 드디어 덕유산 정상의 향적봉(1614)에 올라섰다. 오르는 중간에 휴식을 취하면서 올라온 만큼의 시야로 바라보는 한겨울의 눈 덮인 풍경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올라선 만큼의 넓어진 시선과 일상탈출에서 오는 사이사이엔 삶의 순간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정상에서 스틱으로 등산화에 얹힌 눈을 털어내는데 노발리스의 “너무 기죽지 말게/저기 저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세”라는 시구가 함께 털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흔치 않은 상고대의 풍경을 보면서 한곳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한겨울의 설경을 다문다문 줍고 있을 때, 몇백 미터 아래쪽에는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거기서 내리는 탑승객들의 옷차림과 배낭 등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저 편리하고 빠름의 극치인 케이블카의 오르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눈보라의 강추위임에도 속옷이 땀에 젖도록 느릿느릿 걸으며 몇 시간 만에 올라서는 우리의 모습이 저들에 어떻게 비췄으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는 오름이었을까? 케이블에 매달려 불과 몇십 분 만에 오르는 빠름의 속도에서 말이다. 그리고 하산 길, 생각의 한 끝에는 ‘친환경’이라는 글자를 두껍게 껴입고 천천히 내려왔었다. 최근에 들리는 소식에는 남산 케이블카 옆에 새롭게 곤돌라를 설치한다고 한다.

 

“사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계단의 끝, 문 앞에 이르렀을 때이다.”

 -르네 샤르(Rene Char)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4.03.11 11:48 수정 2024.03.1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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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