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 칼럼] 안개가 그립고 두려울 때

신연강

성장통을 앓던 시절에 내가 애용한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다. 불평할 겨를도 없이 입시로 내몰릴 때, 꽉 막힌 마음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도 자전거였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몸에는 활력을, 마음에는 자유로움을 불어넣었다. 고등학교 내내 등·하굣길에 자전거를 탔으니, 사이클 손잡이를 놓고도 수백 미터를 달리곤 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면 미군이 주둔했던 캠페이지 외곽 길을 지나 중앙로 차도를 따라가며 안개 속을 달렸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줄지어 선 아름드리 포플러 가로수가 마치 팔 벌린 사람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광경이다. 밤늦은 시간에 한적한 길을 달리면 조금 외롭기도 하지만, 하루를 끝냈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안개 망토를 두른 나무가 팔을 벌려 반겨주는 듯해서 마음이 푸근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자란 도시는 ‘안개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부여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때의 안갯길, 안개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듣는다. ‘열린음악회’에 초대된 가수 정훈희. 그녀가 부르는 <안개>는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을까. 시대변화를 반영하듯, 열린 마음을 지향하듯, 그녀가 성악가 길병민과 함께 노래한 <안개>는 신·구의 조화를 넘어선 그윽하고 아름다운 무대를 선사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음색으로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불러줄 수 있다는 것, 또 그러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가수에게나 청중에게나 즐거움이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로 시작하는 <안개>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첫 소절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노래를 들으며 외로움은 흥겨움으로, 흥겨움은 즐거움으로 바뀐다. 더불어 한 편의 시,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의 「안개(Fog)」를 떠올린다. “안개는 온다, 작은 고양이 발로/ 가만히 쪼그려 앉아, 항구(港口)와 도시(都市)를 바라보곤/ 살며시 떠나간다.” 안개 낀 포구에 살며시 나타나 상념에 잠긴 고양이. 존재는 포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 나는 고양이가 된다. 안개 자욱한 포구에서, 그리고 연무가 강처럼 흐르는 호숫가에서.

 

하지만 오랜 기억 속에 자리한 그 안개도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안개가 예전처럼 짙지도 않거니와 아름드리나무가 사라진 정체불명의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밋밋한 콘크리트 빌딩이 우후죽순 솟아 이곳저곳을 내려 본다. 거인을 품었던 안개 낀 거리의 장관을 더는 볼 수 없어 서운하다. 하지만 그 많은 시간을 흘려보낸 나는 또 다른 안개 속을 걷는다.

 

시대의 변화가 너무 빨라 미래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예측 불가의 불확실성은 고도의 과학에 기인하는데, 특히 AI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과학, 기술 발전은 인류에게 큰 선물이면서도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인공지능(AI)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우리 삶 속으로 밀려오는 도도한 물결. 얼마 전에 AI가 하루도 안 걸려 책 한 권을 뚝딱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책 한 권을 쓰려면 작가는 셀 수 없는 밤을 지새우고 심지어는 수년 동안 공을 들여야 한다.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물건을 내어놓는 AI의 작업은 작가를 더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게 만든다. 무엇보다 한 명의 작가가 존재하기까지 사고력, 통찰력 그리고 창의력 등을 오랜 기간 함양하고 훈련해 온 점을 생각한다면, AI가 보여주는 능력은 실로 대단하면서도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AI 중에서 특화된 프로그램 중 하나인 GPTs는 앞으로 인류의 만능 해결사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하잘것없게 만드는 위협적 시스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실행 명령어인 프롬프트(prompt)를 정교하게 짜서 제시하는 만큼 매우 구체적이고도 놀랄만한 성과를 내놓을 수 있다고 하니, 앞으로의 발전 또한 획기적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GPTs는 사용료 20달러를 내면 이용이 가능하지만, 장차 운용에 자신이 생겨 보편적으로 상용화된다면 비용은 많이 상승할 것이다. 공상 영화 속 장면은 어느새 현실로 다가와 있다. 지금 제조업 현장의 로봇은 인간과는 달리 단순 작업을 쉼 없이 해나가고 있으며, 최첨단 시설을 한 공장과 실험실에서는 로봇이 사람 사이를 걸어 다닌다.

 

미래라는 안갯길 속에서 기대 반 우려 반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기계와의 경쟁에서 우리 인간은 이길 수 있을까, 챗GPT가 고도화하는 시대에 내 글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앞으로 작가들은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창의력을 넘어서고 급기야 통제력을 벗어난 AI를 상대로 영혼을 거래하거나 굴복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AI를 바라보는 마음은 호기심에서 이내 두려움으로 바뀌고, 이제 조금씩 무덤덤하게 변한다.

 

<안개>를 들으면서,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로 시작하는 첫 소절을 자신도 모르게 되뇐다. 샌드버그의 시 「안개」를 떠올리며 내 상념은 더 깊어 간다. 성큼 다가선 미래 어느 때의 일일지 모르겠지만, 밤길을 걸을 때 옆을 스쳐 가는 존재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사람일까, 아니면 사이보그(기계화된 인간)일까, 그도 아니라면 로봇일까. 안개 속에서 인간을 그리워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AI의 발전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

이메일 :imilton@naver.com

 

작성 2024.03.14 10:31 수정 2024.03.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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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