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전라도사 최철견과 장렬왕후

윤헌식

조선시대 관찰사(감사) 아래에는 그들의 보좌관 역할을 하는 도사(都事)라는 관직이 있었다. 도사는 종5품 벼슬로서 도 내의 실무와 감찰 등을 담당하고, 관찰사와 함께 수령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였다. 또한 관찰사 유고 시에는 그 직임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전라도의 도사는 최철견(崔鐵堅)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임진장초』의 「옥포파왜병장」(1592년 5월 10일)에는 적진포해전 직후 선조가 피난을 갔다는 소식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소식을 보낸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전라도사 최철견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정암(李廷馣, 1541~1600년)의 『사류재집』 에 따르면 최철견은 1593년 6~7월까지 전라도사를 지냈다.

 

​최철견의 자는 응구(應久), 본관은 전주(全州), 생몰년은 1548년~1618년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전라도사 최철견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아래는 그 관련 기록을 옮겨 놓은 것으로서, 비록 단편적인 내용이지만 당시 도사가 어떠한 직무를 수행했는지 엿볼 수 있다.

 

 

『난중일기』 1592년 3월 24일

순찰사(이광)와 도사(최철견)의 답장을 송희립이 함께 가지고 왔다.

 

[원문] 廵使都事答簡 宋希立並持來.

 

(1) 순찰사: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업무를 처리하던 임시 관직으로서, 당시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임하였다.

 

『난중일기』 1593년 2월 5일

보성군수(김득광)이 밤새 육로로 달려왔기에 뜰에 붙잡아 놓고 그 기한을 어긴 죄를 따졌더니, 순찰사(권율)와 도사(최철견) 등이 명나라 군사를 지공할 차사원으로서 (보성군수를) 강진, 해남 등의 고을에 갈 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원문] 寶城守冒夜由陸馳來 拿于庭 推問其後期之罪 則巡察使都事等 以天兵支供差使員 行到康津海南等官之招.

 

(1) 지공: 군량이나 마초 등을 준비하여 군대를 지원하는 것이다.

(2) 차사원: 특정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임시로 차출하는 관원이다.

 

최철견은 1576년 식년시(式年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력이 있다. 그런데 이순신 또한 같은 해 식년시 무과에 합격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동방(同榜-과거 급제 동기)인 셈이다. 이순신과 최철견은 과거 급제 동기이고, 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업무적으로 관련이 있는 직책에 있었으니 서로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광주목읍지』의 「읍선생안」에 의하면 최철견은 1593~1596년까지 광주목사를 지냈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이순신은 1596년 8~9월 사이 도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전라도 지방을 순시하였는데, 순시하는 중에 광주에 들려 광주목사 최철견을 만난 일이 있었다.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에는 이순신과 최철견의 친분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난중일기』 1596년 9월 19일

이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이 와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술을 마시면서 밥은 먹지 않았으므로 취하였다. 광주목사의 별실로 들어가서 종일 흠뻑 취하였다. 12시경에 능성현령이 들어와서 창고를 봉하고 “광주목사를 체찰사(이원익)이 파직시켰다.”라고 하였다. 최철견의 딸 귀지가 와서 숙박을 하였다.

 

[원문] 是朝 光牧來 同朝飯 因作酒不食而醉. 入光牧別室處 大醉終日. 午 綾城入來 封庫 光牧体相罷黜云. 崔女貴之來宿.

 

 

신흠(申欽, 1566~1628년)의 『상촌집』과 『전주최씨구수세보』에 따르면 최철견은 서자를 포함하여 모두 4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관련 기록에 나타난 최철견의 네 딸과 사위의 생년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딸과 사위 박신(朴信)의 생년: 계해년(1563년)과 신유년(1561년) - 『밀양박씨사문진사공파세보』

 

둘째 딸과 사위 목륭(睦霳)의 생년: 미상

셋째 딸과 사위 심기(沈綨)의 생년: 계유년(1573년)과 기사년(1569년) - 『청송심씨족보』

넷째 딸과 사위 조창원(趙昌院)의 생년: 두 사람 모두 계미년(1583년) - 송시열의 『송자대전』

 

조선시대 혼인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대개 20세 전후에 이루어졌는데, 특히 여자의 경우는 후사를 낳을 목적 등으로 혼인하는 나이가 20세를 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위 『난중일기』의 기록이 쓰여진 1596년경에 최철견의 장녀, 차녀, 삼녀는 이미 혼인을 하여 출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상촌집』과 『전주최씨구수세보』에서 이름이 누락(일찍 사망하는 등의 이유로)된 최철견의 딸이 없다면, 위 『난중일기』에 나타난 최철견의 딸 최귀지는 넷째 딸일 가능성이 높다.

 

최철견의 넷째 딸은 후일 조창원(趙昌院)과 혼인하여 1남 3녀를 낳게 되는데, 그들 가운데 셋째 딸이 바로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인조의 첫째 부인인 인열왕후(仁烈王后)가 1635년 산후병으로 죽은 뒤, 1638년 그 뒤를 이어 장렬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조창원과 그의 부인 최씨(최철견의 넷째 딸)는 왕비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각각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과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장렬왕후의 릉 휘릉(徽陵)의 능침 전경 - 자료 출처: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장렬왕후의 릉 휘릉(徽陵)의 능침 전경 - 자료 출처: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흥미롭게도 『난중일기』에 나타난 최철견의 딸 최귀지의 이름이, 다른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장렬왕후의 어머니 완산부부인의 이름일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참고자료: 이수환, 2006, 『민족문화논총』 34집, 「조선전기 경상감사와 도사의 순력과 통치기능」,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이정암(李廷馣), 『사류재집(四留齋集)』 권8, 「행년일기상(行年日記上)」. 신흠(申欽), 『상촌집(象村集)』 권28, 「신도비명(神道碑銘)」-「관찰사최공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 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11권 「행장(行狀)」-「완산부부인최씨행장(完山府夫人崔氏行狀)」. 『광주목읍지(光州牧邑誌)』의 「읍선생안(邑先生案)」. 『전주최씨구수세보(全州崔氏九修世譜)』. 『밀양박씨사문진사공파세보(密陽朴氏四門進士公派世譜)』.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3.15 10:08 수정 2024.03.1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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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