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어느 지인의 1980년대의 회상 – 귀국

김태식

일행은 식사를 하기 위해 공항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선원들 모두 정상적인 비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범법자의 신분으로 추방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라스팔마스 기지장에게 연락했고 인솔비 명목으로 받은 미화 300달러로 가장 저렴한 식사를 시켰는데도 남은 돈은 고작 1달러짜리 두 장 뿐이었다. 앞으로 하루 혹은 반나절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정 기관장은 앞이 캄캄했다. 

 

풀죽은 모습으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항경찰이 일행을 찾아왔다.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랐다. 혹시 또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공항경찰은 다정하게 얘기를 했다. 누군가가 정 기관장을 찾아 왔다는 표시를 하고 있었다. 

 

출입이 통제 되어있는 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정 기관장의 시야에 친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라스팔마스 기지장이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그분의 얘기는 어제 이곳에서 처한 상황을 보고 받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이 밝자마자 파업 중에 임시로 운항하는 전세기편을 타고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분이 출입국관리사무소와 합의를 보았고 그분이 신분 보증을 서고 전 선원들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서울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훈훈한 휴머니즘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인생길에서 한 획을 긋는 일이 되었다. 잠시나마 기지장의 따뜻한 후의를 생각할 즈음 비행기는 서울로 향하기 위해 랜딩기어를 굴리고 있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군부독재와 유신체제 잔재 청산을 요구하며 극렬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정부는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침묵을 강요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공항에서 인솔 책임자인 정 기관장은 서울 강서경찰서 외사과로 연행되어 밤늦도록 모리타니 현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술을 했다. 덧붙여 북한에 대해 민감했던 시절이라 북한대사관이 있는 모리타니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 질문의 핵심요지였다. 한참 조사를 진행하다가 형사분들이 시위 진압에 동원되느라 바빠서 그러니 언제든지 호출하면 다시 오겠다는 손도장을 찍고서야 귀가를 했다.

 

큰돈을 벌어 오겠다고 이국 멀리 스페인 라스팔마스행 비행기를 타고 갔지만 다시 돌아온 한국에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했고 슬펐던 감방 생활의 추억만을 안고 왔다. 아내를 만난 기쁨보다는 미안한 마음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허무한 마음과 착잡한 심정을 간직한 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선원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먼저 석방되어 한국으로 귀국한 1개월 후 모리타니 현지 소식을 들었다. 모리타니 대법원 최종공판에서 항해사 4명은 석방판결을 받았고 선장은 원심대로 미화 320만 달러의 벌금을 낼 때까지 수감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선장 혼자 수감되어 있던 어느 날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국의 원양어선 선장 한 사람이 모리타니에 장기간 억류되어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그때서야 한국 정부 차원에서 외교라인이 가동되었고 국가 차원의 협상을 통해 선장도 석방되었다. 청와대에 보고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 선원들의 수감 소식은 어떤 매스컴을 통해서도 기사 한 줄 보도되지 않았다.

 

정 기관장이 선장을 만났을 때 선장은 오랜 수감생활로 인해 어둠에 대한 심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한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굳게 잡은 손에는 자로 측정할 수 없는 세월의 길이와 저울로 잴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지고 있었다.

 

정 기관장은 오늘도 바다가 보이는 부산 영도사무실에서 잠시 상념에 젖어 보기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제 수단이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한 방법도 여러 가지다. 시대에 따라서 그 방법도 다양하게 변해간다. 약 40년 전의 원양어선 선원이라는 직업은 한국경제의 초석을 다지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바다와 싸웠고 불법조업이라는 위험도 감내했다. 

 

정 기관장이 원양어선 기관장으로 승선 근무했을 때의 기억은 창고 속에 켜켜이 쌓여 오래된 옛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

 

작성 2024.03.19 10:55 수정 2024.03.1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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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