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의 신상

윤헌식

적량진은 조선시대 흥선도(興善島)에 있던 경상우수영 소속의 진포(鎭浦)이다. 흥선도는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창선면은 창선도라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을 말하며, 적량진은 지금의 창선면 진동리의 적량 마을의 위치에 있었다. 

 

적량진은 태종 7년 이전에 만호진으로 설치되었다가 태종 7년에 혁파되었다. 이후 남해 일대에 대한 방어의 필요성이 커지자, 세종 즉위년에 다시 적량진에 병선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세종 21년에 적량의 강어귀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적량에서 지도포(池島浦)로 병선의 정박지를 옮겼다.

 

그 이후 적량진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 사료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이다. 『난중일기』의 1593~1596년 일기에는 고여우(高汝友)라는 인물의 이름이 9차례 등장하는데, 그 직책은 '적량만호' 또는 '전(前) 적량만호'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 21년에 적량에서 병선의 정박지가 옮겨간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어느 시기에 적량진이 다시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 보이는 적량만호 ‘高汝友’의 이름은 ‘高汝雨’의 오기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대의 문헌에서 ‘高汝友’라는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高汝雨’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보이는데, 이 인물이 만호나 첨사를 지낸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에 '雨'라는 글자를 쓰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순신이 고여우의 이름을 ‘高汝友’로 오기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고여우(高汝雨)의 자는 상경(商卿), 본관은 제주(濟州), 생몰년은 1544~1613년이다. 그의 신상은 「만력11년계미9월초3일별시방목(萬曆十一年癸未九月初三日別試榜目)」의 무과급제자 명단, 『제주고씨대동보(濟州高氏大同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과에 급제한 이력이 있고 생몰년이 1544~1613년이므로 임진왜란 시기에 만호로서 활동할 만한 이력과 나이를 갖춘 인물이다.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의 생년은 1545년이다.

 

천안시 풍세면에서 출토된 고여우의 만사 - 자료 출처: 「천안 풍세면 출토 제주고씨 유물에 대한 연구」

 

고여우(高汝雨)의 직책은 『선조실록』의 기사(179권, 선조37년-1604년 윤9월3일 경진 3번째 기사)에는 감찰(監察)로, 이원(李黿, ?~1504년)의 『재사당일집』 권2의 「부록(附錄)」-「행록(行錄)」에는 만호(萬戶)로, 이유간(李惟侃, 1550~1634년)의 『우곡일기』의 1610년 5월 7일 일기에는 노강첨사(老江僉使)로 기록되어 있다. 재사당 이원이 1504년에 사망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록에 고여우의 이름이 나타나는 이유는 고여우가 이원의 증손녀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계축만력41년증광사마방목(癸丑萬曆四十一年增廣司馬榜目)」의 무과급제자 명단에는 고여우의 아들 고세영(高世榮)의 이름이 실려 있는데, 그의 가족 사항에 따르면 고여우는 노강첨사(老江僉使)를 지낸 이력이 있다. 흔치 않은 이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대의 인물로서 만호와 첨사를 지낸 이력까지 있는 점으로 보아 고여우(高汝雨)가 『난중일기』의 고여우(高汝友)임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이원의 족보인 『경주이씨대종보』에 따르면 고여우(高汝雨)는 이원의 증손녀의 남편으로서, 본관은 청주(淸州), 벼슬은 판관(判官), 아들의 이름은 고준영(高俊榮)이다. 족보의 기록은 고여우의 본관을 제주가 아닌 청주로 기록하고 있고, 『제주고씨대동보』에 기록된 고여우의 두 배위(配位)는 김제조씨(金堤趙氏)와 단양우씨(丹陽禹氏)로서 이원의 증손녀 경주이씨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이씨 형제들의 생년이 1500년대 중후반이고 아들 고준영의 이름이 고여우의 방목에 실린 고세영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영(榮)자 돌림이기 때문에 『경주이씨대종보』에 실린 고여우의 신상은 일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고여우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1995년 충남 천안시에서 그의 묘를 이장하던 중에 의류와 그릇 등을 비롯한 매우 많은 수의 유물이 발견되어 이에 관한 연구 논고가 발간된 점이다. 이 논고는 「천안 풍세면 출토 제주고씨 유물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 자료로서 출토 현장의 조사 과정, 수십 가지 유물에 대한 사진과 내역, 묘 주인의 인적 사항 등을 자세히 수록하였다. 특이하게도 고여우의 묘에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인 만사(輓詞) 20점이 발견되어, 그의 몰년까지 파악이 가능하였다.(만사는 묘의 주인이 부인과 같은 해에 70세로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고여우 유물의 출토는 역사 기록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아쉽게도 위 논고에는 충남 천안시에서 발굴된 묘와 『난중일기』의 고여우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이에 대한 학자들의 추가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유간(李惟侃)의  『우곡일기(愚谷日記)』

한국고전종합DB, 이원(李黿)의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6, 『조선시대 수군진조사3 경상우수영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고부자, 1997, 『한국복식』 제15호, 「천안 풍세면 출토 제주고씨 유물에 대한 연구」,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경주이씨대종보(慶州李氏大宗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3.22 09:22 수정 2024.03.2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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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