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경상우수영 우후 이의득의 신상

윤헌식

우후(虞候)라는 관직은 조선시대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 아래에서 그들을 보좌하는 부직(副職)으로서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수군우후는 정4품의 품계였다. 『선조실록』의 기사(27권, 선조25년-1592년 6월 28일 병진 6번째 기사)에 따르면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영의 우후는 우응진(禹應辰)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1593년 5월 10일 일기부터 경상우수영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592년 6월에서 1593년 5월 사이에 우후 우응진이 이의득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우후 이의득의 상관이었던 경상우수사 원균이 워낙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의득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임진왜란 대부분 기간 계속 한 자리를 지키면서 전쟁의 상황을 몸소 겪었던 인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그의 신상이라도 한 번쯤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의득의 신상은 우선 「만력12년갑신추별시문무방목(萬曆十二年甲申秋別試文武榜目)」의 무과급제자 명단, 『벽진이씨대동보』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방목에 따르면 그의 자는 득지(得之), 본관은 벽진(碧珍), 생년은 1544년, 아버지의 이름은 이성재(李成材), 동생의 이름은 이예득(李禮得), 거주지는 고령(高靈)이다. 방목에 기록된 그의 아버지와 동생의 이름은 『벽진이씨대동보』에서도 확인이 된다. 『벽진이씨대동보』는 이의득에 대해 '무과 출신으로서 우후를 지냈으며 후사가 없다(武科虞候无后).'라고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벽진이씨대동보』에 따르면 이의득은 벽진이씨 산화파(山花派) 파조 이견간(李堅幹)의 9대손이다.

 

​무과급제자 명단과 『벽진이씨대동보』 이외에도 이의득의 신상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피난 생활을 기록한 여러 가지 일기 가운데 도세순(都世純, 1574~1653년)이라는 인물이 쓴 『용사일기』가 바로 그 기록이다. 이 일기는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개터 마을에서 생활하던 도세순이 부모님과 어린 동생 등과 함께 피난 생활을 한 경험을 담고 있는데, 일기를 쓴 도세순이 전쟁 발발 당시 18세 소년이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다음은 도세순의 『용사일기』에 나오는 우후 이몽구와 관련된 기록이다.

 

도세순, 『용사일기』, 1593년 11월 19일

 

형님(도세순의 형)은 이의득(李義得)을 보러 용담(用淡)으로 가셨다. 의득은 우후(虞候)이다. 수군을 순시하는데, 장정들을 징집하여 군에 보내는 일을 맡고 있다. 주달문(朱達文)이 청하기를 이 장수에게 연통하여 징집을 면제해 주면 후하게 보답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님은 박씨 어른을 들이대며 주달문의 징집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의득은 들어주지 않았다.

 

위 일기에 보이는 용담은 경상도 고령(高靈)에 속한 지명이다. 우후 이의득이 수군 징집을 위해 경상우수영 소속 고을 가운데 하나인 고령으로 왔을 때, 주달문이라는 사람이 도세순 집안에 징집을 면제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도세순의 형이 같은 마을 사람인 박 씨 어른의 청이라고 하면서 징집의 면제를 청탁하였지만, 이의득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 일기의 내용은 이의득이 고령 출신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위에서 살펴본 방목에도 이의득의 거주지가 고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이 『용사일기』에 나오는 내용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테마파크-일기와 생활" 홈페이지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경상우수영 우후 이의득의 이름은 『난중일기』의 1593~1597년 일기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의득의 최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래의 두 가지 사료를 살펴보면 이의득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1. 손기양(孫起陽, 1559~1617년), 『오한집』 권4, 「일록(日錄)」 1598년 12월 3일

: 노량해전 전사자 명단에 경상우수영 우후(慶尙右水營虞候)가 포함됨 (성명 없이 관직만 기록되어 있다.)

 

​2. 통영의 『충렬사지(忠烈祠誌)』의 「절도사명단(節度使名單)」

: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의 우후의 성명이 이의득(李義得)으로 기록됨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은 1597년말에 경상우수사로 제수되어 1598년 노량해전에 참전하였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노량해전 최대 접전지 관음포 

 

비록 이의득은 그의 상관이었던 원균 때문에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장수로서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사실을 하나만으로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벽진이씨대동보(碧珍李氏大同譜)』

도세순(都世純)의 『용사일기(龍蛇日記)』, 2009년, 새박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일기와 생활

한국고전종합DB, 손기양(孫起陽)의 『오한집(聱漢集)』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4.05 10:24 수정 2024.04.05 11:02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