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향수(香水)

허정진

탁자 위에 향수병이 서너 개 있었다. 선물을 받았거나, 그 향기가 좋아 구입했던 것들이다. 은퇴한 이후로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굳이 버리지 않았다. 아깝기도 하고, 또 언젠가 다시 뿌릴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였다. 

 

‘연기로 통한다.’라는 뜻을 가진 향수. 5천 년 전부터 신(神)과의 ‘교감’과 ‘소통’을 위해 사용됐다고 들었다. 은은하면서도 매혹적인 향기, 마치 내 몸에서 진짜로 그런 향이 나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신사의 품위에 마땅한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멋을 내고도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로맨틱하고 유혹적인 향기라면 금상첨화였다. 어쩌면 땀 냄새, 술이나 담배 냄새 같은 나쁜 체취를 감추려는 의도도 한몫했는지도 모른다.

 

날씨나 기분에 따라서 이런 날은 이 향수로, 또 저런 날을 저 향수로 나를 포장했다. 나에게 어울리는지, 나의 고유체취와 버무려져 어떤 향기가 나는지도 모르고 상대가 좋아할 만한 향기를 골랐다. 관심을 끌거나 주목받고 싶은 욕구에 목마른 영혼보다 물오른 몸이 앞섰다.

 

가끔 “향수 냄새가 좋다.”거나 “무슨 향수냐?”고 물어오거나 하면 한껏 기분이 우쭐거렸다. 분명 향수가 좋다는 말인데 내가 좋다는 말처럼 들렸다. 향수를 나의 이미지로 착각했다. 먼 훗날에도 그 향수 냄새를 맡으면 그들이 나를 기억해줄 것 같았다.

 

시골에서 농장을 하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 계절에는 산 너머 지는 노을빛이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너무나 황홀하다고 했다. 오랜만에 향수를 뿌릴 일이 생겼다. 온몸에 아로마틱 향기를 강하게 뿌리고 달려갔다.

 

마당 평상에 막걸리 상이 차려졌다. 어렴성 없는 강아지처럼 산 그림자도 한 걸음씩 다가왔다. 미처 샤워도 못 하고 달려온 친구의 몸에서 쉬척지근한 땀 냄새, 비릿한 풀냄새가 났다. 유혹적이지는 않았지만 풋풋하고 유쾌한 사람 냄새가 느껴졌다. 어떤 술수로도 지울 수 없고, 어떤 계략으로도 통하지 않는 민낯 냄새였다.

 

친구의 얼굴은 산뜻하고, 표정은 따뜻했다, “하하하” 크게 목을 젖힌 웃음에서 그리운 살냄새가 났다. 자극적이거나 현혹적이지 않았다. 감추지 않고, 치장하지 않아도 그 어디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비 오는 날은 빗물처럼, 따사로운 날은 햇살처럼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의 냄새였다. 

 

남을 위한 냄새가 아니라 자신의 냄새였다. ‘좋은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자유와 해방감에서 나는 냄새였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기에게 충실한 삶이었다. 그 냄새는 당당하고 또 정직했다. 나를 속이고 감추고, 가면 속에서 나 아닌 나로 사는 냄새와는 근원적으로 달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탁자 위의 향수병을 치워 버렸다. 선물로 준 그 사람을 잊겠다거나, 늙어서 더 이상 멋 낼 일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남에게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뭘 맞춰 준다는 고민도 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노인 냄새라 할지라도 이제는 나도 내 냄새로 살기로 했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4.16 01:05 수정 2024.04.16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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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