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에서 ‘절규’를 떠올리다

홍영수

필자는 군 생활을 서해안 바닷가에서 했다. 3년의 세월 동안 저 먼바다의 수평선 자락에 걸친 일몰 광경을 보면서 근무했다. 늦은 오후 근무 때 바라보는 서녘의 노을이 유난히 붉고 짙을 때가 있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수평선 끝자락에 걸친 노을빛, 개인의 일탈이 용납되지 않고 그래서 탈출구가 없는 얽매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생활환경에서 보는 그 풍경은 또 다른 의미의 붉은 풍경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렇게 내외적으로 억눌리고, 메마른 감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검붉게 타오르는 노을빛은 그날의 심적 요인에 따라 다르게 느끼게 된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대신한 듯한 표정의 빛으로, 때론 내가 불타는 듯한 노을 속에 빠져들어 커다란 소리를 치고 있는 착각하는 것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바로 그때 시선과 가슴을 통해 절규하는 듯한 노을빛 속에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과 그 작품 배경에 대한 그의 말이었다. 

 

미술평론가들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를 아르누보의 실험 및 표현주의의 선구자라고 한다. 이러한 까닭은 뭉크가 인간의 애정. 사랑, 증오 등과 죽음에 대한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삶 또한 그만큼 치열했다.

 

뭉크의 ‘절규’는 그 어떤 강력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나 상황,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단순히 추상적인 표현과 모호한 의미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통과 절망을 비극적인 심상으로 나타내고, 그 중심 속 인물의 모습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고 있고, 두 손으로는 귀를 막고 있는 모습에서 고통과 절망을 비극적 심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무력감을 묘사하면서 심리적인 고통을 공감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광활한 배경 속에 붉은 색조로 고민스러운 분위기의 표현 속에 인간의 내면적인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그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분위기와 개인의 심리적인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산업화와 현대화로 인한 커다란 사회적 변화에서 오는 심리적인 불안, 거기에서 오는 개인의 내면적 갈등이 나타난 시기였다. 뭉크는 ‘절규’라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개인의 내면적 갈등의 심리 상태를 탐구하고 복잡한 감정과 상태를 표현하지 않았을까 한다.

 

미셸 시옹은 출처를 볼 수 없는 가운데 들게 되는 소리를 ‘청각적 목소리’라고 했다. 한마디로 ‘담지자 없는 목소리’를 말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환청, 즉 어떤 외부 환경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되는 증상이다. 청각적 목소리는 장소와 관계없이 어디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공포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지젝에 의하면 뭉크의 작품 “절규‘에 나타난 연상의 의미이다. 이러한 청각적 목소리는 꽉 막혀있는 곳에서도 확 뚫을 수도, 터뜨릴 수 없는 소리 속에서 스스로 해방감을 느낄 수 없어 지르는 비명일 수 있다.

 

에드바르 뭉크나 벨기에 출신 앙소르는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이다. 표현주의는 사물의 외형에서 오는 인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잔이나 고흐, 고갱 등의 인상주의에 더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표현주의자들은 사물의 외형을 강렬하거나 현란한 색채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삶과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힘을 쏟아붓는다. 뭉크의 작품 ‘절규’가 그렇다. 

 

 그리고 벨기에 출신 화가 앙소르의 <우는 남자 The Man of Sorrows>의 작품도 뭉크의 ‘절규’처럼 통렬한 아픔을 느끼는 작품이다. 자비를 베푸는 예수의 형상이 아니라 누굴 향해 조소하는 듯한 얼굴 모습이지만, 알 수 없는 비애가 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슬픔을 안고 있는 눈빛과 형상이 우리에게 롤랑 바르트가 얘기하는 푼크툼을 느낀다. 

 

이들에게는 어떤 사물이나 세상의 흐름에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이때 느낌은 아프게 통렬하고 아프게 느끼면서 우리의 삶이 죽음에 가깝다는 듯이 표현한다. 뭉크의 ‘절규’처럼. 

 

푼크툼(punctum)은 라틴어로 점(點)을 의미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적으로 꽂히는 어떤 강렬한 마침표이다. 예를 들면, 에로틱하고 다소 외설스럽게 느낄 수 있는 영화 ‘뽕’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짓는 것과 같다. 그것은 영화 속 뽕잎을 보면서 순간 뽕잎을 따서 누에를 키웠던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뭉크의 작품‘절규’가 작품 속 인물이 절규하고 있는 모습인지 그 인물이 절규를 듣고 있는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사람의 절규인지 자연의 절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언제나 폭발 직전의 화약고 같은 중동지역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차마 보고 싶지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무시무시한 장면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코‘절규’하지 말아야 할 ‘절규’를 떠올리는 이유이다.

 

 

이승하는 자신의 시 ‘화가 뭉크와 함께’에서 뭉크의 그림 ‘절규’를 시로 전이 시켰다. 비정하고 냉정한, 말을 더듬 듯한,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기에 억압하는 사회 속 소외된 절망에 대한 절규가 아닌가 싶다.

 

화가 뭉크와 함께​

 

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 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우 울음 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이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동화 同化 야 도 동화 童話 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이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시집 『사랑의 탐구』(문학과지성사,1987) 수록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4.04.22 11:47 수정 2024.04.22 11:55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