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가위와 놀다

허정진

봄 햇살 좋은 날 묘목 가지치기 작업에 나섰다. 사람 키 정도 되는 어린나무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곧고 굵은 한줄기만 남겨두고 곁가지들을 잘라내는 거였다. 작업반장의 말이 재미있다. 

 

“크게 될 놈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싹 제거하면 됩니다.” 

 

장차 방해될 만한 것은 미리 싹을 없애라는 뜻이었다. 크고 튼튼한 새끼들만 선택해 기른다는 맹수들이 생각나고, 왕이 되지 못해 목숨을 구걸하며 살아야 했던 조선 왕자들의 절박한 삶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쨌든 전지가위를 들고 싹수 노란, 나약한, 뒤처진, 반듯하지 못한 가지들을 온종일 잘라냈다.

 

꽃줄기든, 나뭇가지든 자르는 게 가위의 운명이다. 이제 막 숨을 틔우고 연록 잎을 피운 여린 가지를 자를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고, 허공을 더듬어 자기 삶을 찾아가던 싱싱한 가지가 한순간에 잘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 가슴이 덜컹 아프다. 사람들 눈에 근사한 조형미를 위해 잘려 나가는 가지와 잎새들, 더 많은 수확과 작업의 편의를 위해 노예 같은 형상을 한 과수목들. 그리스 신화 속의 오만한 시민‘에뤼시크톤’처럼 언젠가는 나무들의 여신에게 저주받아 걸신들린 벌이라도 받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의 이치대로 자라는 나무는 당연히 비대칭 구도나 굽은 가지, 병해를 입고 누렇게 말라가는 가지가 없을 수가 없다. 반면에 양분을 혼자 독식하고 저 혼자 잘도 크는 굵은 곁가지도 있다. 그것 또한 제거 대상이다. 그럴 때마다 서로 다른 감정이 교차한다. 잘려 나가는 가지에 안타까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이번에는 고소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공공의 규칙과 질서에 어긋난 행동을 응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사회적 부정의 고리를 잘라내는 심판자의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날이 하나면 칼이지만 두 날이 교차하면 가위다. 날의 우열이나 상하가 없이 서로가 버팀목이고 지지대가 된다. 좌와 우, 암과 수, 음과 양의 합작품처럼 그 힘과 재주가 무궁무진하다. 그 함의가 섬세함과 정교함을 주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자유자재로 재단할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는 털이나 섬유 세포도 잘라낼 수도 있다. 초기 인류에게는 가위가 첨단 문명이었음이 분명하다.

 

가위의 본질은 잘라내는 것이다. 남겨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의 경계를 짓는 가위는 냉철할 수밖에 없다. 가차 없이 잘라내 버려야 하는 당위성에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매달려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자르거나 잘린다는 건 단절이나 소외를 부르기도 한다. 개인적이거나 조직 관계로부터의 단절, 사자가 늙거나 사슴이 다치면 무리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그 심정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내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었다. 하늘과 햇살과 바람을 보고 움과 싹을 틔웠지만 세상의 모퉁이마다 기세등등한 가위가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주어진 토양과 환경의 차이도 있었고,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잣대와 평가도 있었다. 뜻한 바와 달리 알게 모르게 제지당하기도 하고,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토사구팽당하기도 했다. 기회도, 도전도, 운명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살아남은 자의 웅변인지도 모른다.

 

가위가 없는 인간의 역사는 없다. 그리스 신화 속의 아트로포스(Atropos)는 ‘돌아오지 않다.’는 뜻이다. 가위를 든 그 여신은 인간의 삶을 정하는 운명의 실을 어느 지점에서 끊는 역할이다. 그 어떤 신도 인간의 운명을 간섭하거나 정해진 죽음을 막지 못한다고 한다.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서 볼 수 있는 복희와 여와도 있다. 여자 신인 여와가 들고 있는 가위, 남자 신인 복희가 들고 있는 자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위한 신의 도구를 상징한다고 한다. 잣대를 대어보고 기준에 어긋난 것은 잘라버린다는 의미였을까.

 

자르는 가위라고 해서 모두 슬픈 것만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 탯줄에 가위질이 있어야 생명에 호흡이 시작되고, 옷감이나 목재도 마름질 없이는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기 어려운 일이다. 새살을 돋게 하기 위해서는 고름을 짜내야 하고, 마음의 곡절을 마무리하고 새 출발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기도 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뇌물이나 부패로부터 단절하겠다는 선언도 정치권에서 수시로 듣는 이야기다.

 

그것이 가위가 가진 양면성이다. 세상 이치는 양날의 칼과 같은 법, 가위도 차가움과 따듯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부리기에 따라 빛이나 어둠이, 선과 악이 되기도 한다. 머리카락도 억지로 자르면 마음의 상처이지만 제 얼굴에 맞는 모양내기를 하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음식에 가위질이 외국인 눈에는 생경한 문화가 될 수도 있지만 집게로 들고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자를 때 그것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인 도구도 없다.

 

신혼 초였다. 무엇이든 남편을 자기 손으로 완성하고자 했던 아내는 어느 날 이발 도구 세트를 주문했다.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미끈하고 날렵한 가위가 들어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화장실에 간이 의자와 노란 가운을 준비하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전히 눈썰미가 좋다는 것과 미대 출신이라는 자기 확신뿐이었다. 사각거리는 가위질 소리에 불안감을 감추려 눈을 꾹 감았다. 첫 작품은 그야말로 쥐 파먹은 듯 신묘한 스타일이었다. 사랑이 뭔지, 자기가 맘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가위 탓이라고 매번 애꿎은 변명을 들어야 했다.

 

가위를 들었다고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과하거나 모자람이 없는지, 부당하거나 서운한 일은 없는지 두루 살펴서 최선을 다할 일이다. 불공평과 불완전의 오류도 없어야 하고 인정과 배려의 너그러움도 때로는 필요하다. 사람마다 다 살아가는 방향과 가치관이 다른데 내 기준으로 함부로 옳고 그름을 재단하려 들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잘라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의 경계를 넘나들며 때로는 까칠하고, 무례하고, 건방지며, 우월적인 지위를 행사하지나 않았을까 싶다. 내가 좋아한다고, 내가 싫어한다고 남들도 그러할 것이라는 논리는 가위 놀림의 큰 착각이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의 가위가 중요한 것 같다. 세상과 결코 영민하지도 못하면서 쉽게 타협하지도 못하고, 자기 신념에 대한 명확한 줏대도 없으면서 오기와 고집을 앞세우기 일쑤였다. 내가 들이댄 가위는 결국 내가 그 가위질의 객체가 되어 돌아온다. 세상으로부터 소외와 결핍은 결국 나 자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4.23 09:45 수정 2024.04.2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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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