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정유재란 당시 흥양고도해전지 위치 비정(比定)

이봉수

1597년 9월 16일 통제사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은 판옥선 13척으로 전라우수영 앞 울돌목에서 일본군 130여 척과 싸워 31척을 격침하였다. 이후 서해안을 따라 고군산도까지 북상했다가 곧 남하한 다음 잠시 나주 발음도에 정박하였다.

 

조선 수군은 1597년 10월 29일 나주 보화도로 진영을 옮겨 통제영을 설치했다가 1598년 2월 17일 다시 강진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다. 이때부터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을 견제하면서 고흥반도 서쪽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왜군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598년 3월 20일 조선 수군의 추격을 받은 왜선 5척이 흥양현(지금의 전남 고흥군)에 상륙하였다. 당시 흥양의 현감이었던 최희량은 그의 휘하 관군 등과 함께 흥양에 상륙한 왜군을 뒤쫓아가 31명의 목을 베고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흥양현감 최희량은 이 전투의 경과를 보고하는 문서를 순찰사와 통제사에게 보냈는데, 그 문서가 지금까지 현전하여 보물 제660호 『최희량 임란관련 고문서』의 「첩보서목」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은 『최희량 임란관련 고문서』의 해제, 원문이미지, 원문텍스트, 국역텍스트 등을 제공한다. 아래는 「첩보서목」에서 최희량의 전투 경과와 관련한 주요 내용을 옮겨놓은 것이다. 「첩보서목」의 내용은 최희량의 개인 문집인 『일옹집』에도 실려있다.

 

1. ‘통영에 보고하다(報統營)’라는 첨지(籤紙)가 붙어 있다.

 

흥양현감서목

고도(姑島)에 상륙한 왜노(倭奴)가 양강(楊江)을 향하기에 매복장(埋伏將) 송정기(宋廷麒) 등 소속군이 《결문 缺文》 들판에서 밤을 지내기에 한밤중에 《결문》 창고 밑에 바닥에 숨었습니다. 왜노의 머리 3급(級)을 《결문》 첨산(尖山)에서 접전하였는데, 왜노가 대적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노의 머리 30여 급(級)을 베고 1명을 사로 잡았거니와 빼앗은 왜노의 물건 및 군공(軍功)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작성하여 추후에 보고할 계획입니다.

만력 26년(1598년) 3월 20일 행 현감 최 [수결(手決)]

 

[報統營]

興陽縣監書目

姑島下陸倭奴 指向楊江次 埋伏將宋廷麒等所屬軍 《결문 缺文》 山隱伏乙仍于 園圃經夜次 夜半《결문》 等奴故侵○○倉底隱伏 倭頭三級 望《결문》尖山良中接戰 倭奴不能能相敵 三十餘倭頭斬級 生擒一名爲有在果 所奪倭物及軍功等段 詳盡磨鍊 追乎上道計料狀

萬曆二十六年三月二十日 行縣監崔 [手決]

 

2. ‘순영에 보고하다(報巡營)’라는 첨지(籤紙)가 붙어 있다.

 

흥양현감서목

이번 3월 18일에 득양도(得洋島)로부터 왜선 5척이 통제사의 전선에게 쫓겨서 현(흥양현)의 고도(姑島)에 상륙하였습니다. 이에 현감이 정예군과 각 매복장(各埋伏將), 송정기(宋廷麒) 등 소속군과 더불어 활을 쏘며 추격하니 왜적이 망지산(望之山)의 양강창(楊江倉) 밑으로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왜노의 머리 3급을 벤 뒤에 (왜노가) 또 곳곳에 매복해 있다가 재삼 도전해왔으나 왜노가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강(大江)까지 추격하여 《결문》 들판에서 모조리 참수하여 많게는 35급에 이르렀고 사로잡은 왜노는 1명이었는데, 붙잡은 것을 모두 통제사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만력 26년(1598년) 3월 21일 행 현감 최 [수결(手決)]

 

[報巡營]

興陽縣監書目

今三月十八日 自得洋島 倭船五隻 統制使戰船追逐 縣姑島下陸乙仍于 縣監與精銳軍 及各埋伏將宋廷麒等所屬軍 發射追逐 或入望之山楊江倉底 斬級倭爲先三級後 亦處處埋伏 再三挑戰 倭奴不能當敵 追到大江 《결문》 園圃盡斬 多至三十五級 生擒倭一名 幷以捕捉所屬 統制使道上使狀

萬曆二十六年三月二十一日 行縣監崔 [手決]

 

3. ‘통영에 보고하다(報統營)’라는 첨지(籤紙)가 붙어 있다.

현(흥양현)의 고도(姑島)에 상륙한 적을 현감과 매복장 《결문》 추격하여 왜노의 머리 31급을 베고 1명을 생포하였습니다. 빼앗은 여러 가지 물건과 군공을 세운 사람들을 상세히 열거하여 성책(成冊)해 올려 보냅니다.

만력 26년(1598년) 3월 22일 행 현감 최 [수결(手決)]

 

[報統營]

縣姑島下陸之賊乙 縣監及埋伏將《결문》追逐 斬級倭頭三十一 生擒一名 所奪雜物及軍功人等乙 詳細開錄成冊 上道狀

萬曆二十六年三月二十二日 行縣監崔 [手決]

 

위 「첩보서목」의 세 가지 문서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왜선 5척이 득양도로부터 통제사의 전선에게 쫓겨 흥양의 고도에 상륙한 뒤 양강쪽으로 도주하였지만 흥양현감 휘하 조선군이 이를 뒤쫓아가 양강창, 첨산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31명을 베고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첩보서목」에 언급된 득양도는 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양읍 득량리 득량도이다. 득량도의 북동쪽 바다는 육지로 둘러싸여 있는 만(灣)으로서 배가 들어가면 빠져나가 길이 없는 지역이다. 득량도에서 조선 수군에게 쫓기던 왜선 5척이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곳으로 들어가자 어쩔 수 없이 육지로 상륙하여 도주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흥양현의 고도(姑島)는 왜선 5척에 타고있던 일본군이 상륙한 곳이다. 고도는 그 지명으로만 보자면 섬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흥양현감 최희량의 보고서에 기록된 전투 정황을 살펴보면 육지로 연결된 반도(半島)나 곶(串)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반도나 곶의 지명이 종종 ‘島’로 표기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도(姑島)의 지명은 여러 지리지와 읍지에 등장한다. 아래는 그러한 기록들을 옮겨 놓은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편찬)

姑島 在縣西三十里

유형원의 『동국여지지』(1656년 편찬)

姑島 在縣西三十里

『여지도서』(1757~1765년 편찬)

姑島 在縣西十里 有津 通寶城界

『흥양지』(1759년경 편찬)

姑島 在縣西十里 有津 通寶城界

道路조: 縣北斜只峙路 自寶城界南至鹿島鎭一百二十里

縣西姑島津路 自寶城界海邊東至呂島鎭七十里

『신증흥양지』(1758년 편찬, 1899년 전사)

姑島 在縣西三十里 有津 通寶城

『동국문헌비고』(1770년 편찬)

姑島 在西北十里 寶城路

 

위 사료에 기록된 고도의 위치를 살펴보면, 사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고도의 위치는 흥양읍치에서 서쪽 또는 서북쪽으로 두 가지 방향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리 또한 10리 또는 30리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사료에 기록된 방향과 거리만 가지고는 고도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여지도서』, 『흥양지』, 『신증흥양지』, 『동국문헌비고』는 고도에 대해 중요한 지리적 특징을 기록하였다. ‘진이 있다.’는 기록과 ‘보성으로 통하는 길이다.’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흥양에서 보성으로 갈 때 고도에 있는 진을 통해서 가는 길이 지름길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여지도서』에 수록된 흥양현 지도를 살펴보면, 고도가 흥양현 두원면(지금의 고흥군 두원면) 끝 부분에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광여도(廣輿圖)』, 『여지도(輿地圖)』, 『지승(地乘)』,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에 수록된 흥양현 지도에도 고도가 『여지도서』와 마찬가지로 두원면 끝에 그려져 있다.

 

『여지도서』, 「흥양현」 - 자료출처: 한국고전종합DB

 

그런데 조선시대 흥양현 두원면에 해당하는 지금의 고흥군 두원면을 현대 지도에서 살펴보면, 두원면 끝 부분에서 고도라고 볼 수 있는 섬을 찾기 힘들다. 단, 흥양읍치(지금의 고흥군 고흥읍)에서 보성읍치(지금의 보성군 보성읍)로 갈 때 두원면 끝부분에서 배를 타고 북서쪽으로 가는 길이 흥양에서 보성으로 가는 지름길에 해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전남 고흥군 두원면 일대 지도 - 자료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맵

 

1760년 이전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비변사인방안지도』에 수록된 흥양현 지도를 살펴보면, 위에서 검토한 『여지도서』의 흥양현 지도와 조금 다른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비변사인방안지도』, 「흥양」(지도 일부) - 자료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비변사인방안지도』에 수록된 흥양현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원면 제일 북단에 ‘有津船 姑味島’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표기는 ‘고미도에 배가 정박하는 진(津)이 있는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에서 고미도(姑味島)는 고도(姑島)의 또다른 지명으로 보인다. 즉, 이는 『여지도서』, 『흥양지』, 『신증흥양지』, 『동국문헌비고』에 보이는 고도에 진이 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또한 위 지도는 고도가 육지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 아니라 육지와 붙어 있는 어떠한 지역임을 보여준다.

 

『비변사인방안지도』의 흥양현 지도에 나타난 구룡지(九龍池)는 지금의 두원면 용당리 구룡 마을 옆에 있는 연못인 구룡제에 해당한다. 구룡지에서 조금 서쪽의 해안에 표기된 와우포(臥牛浦)는 지금의 두원면 대금리 신흥 마을 북서쪽 해안으로 추정된다. 대금리 신흥 마을 북서쪽 해안이 얼마전까지 와동(臥洞) 또는 와포(臥浦)로 불렸기 때문이다.

 

『비변사인방안지도』의 흥양현 지도에 표기된 지명 고미도(고도), 구룡지, 와우포의 위치로 미루어보면 고도의 위치는 대략 지금의 두원면 용당리나 대전리의 해안 부근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유희춘(柳希春, 1513~1577년)이 쓴 일기인 『미암일기』에는 고도가 육지에 연접한 곳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내용이 있다. 아래는 『미암일기』의 해당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미암일기』 1571년 4월 13일

일찍 출발하여 50여 리를 가서 흥양의 양강역에 이르러 공문을 처결하고 점심을 먹었다. 신시(오후 3~5시)에 현(흥양현)에 들어가 공문을 처결하고 저물녘에 이르러 《후략》

 

『미암일기』 1571년 4월 14일

맑았다. 방 안에 앉아서 업무를 처결하였다. 《후략》

 

『미암일기』 1571년 4월 15일

맑았다. 일찍 일어나 일찍 제반(除飯)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하였다. 문을 나가 학궁(學宮)에서 알성(謁聖)을 하고 15리 정도를 가서 고도(姑島)에서 점심을 먹었다. 녹도만호(鹿島萬戶)가 군관(軍官)을 시켜 배를 준비하고 사공과 격군(格軍)과 방포공(放砲工)을 보내와 건너갈 수 있게 준비해 주었다. 내가 판옥선에 오르니 배의 제도가 자리를 높게 해 주었다. 그 루(樓)에 오르니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바라보였다. 《중략》 보성 부근에서 알성(謁聖)을 하고 명륜당(明倫堂)을 보았다. 《후략》

 

※ 제반: 밥 먹기 전에 밥을 조금 떠내어 곡신穀神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고수레

※ 학궁: 향교의 별칭으로서 고흥향교를 가리킨다. 고흥향교는 1441년 창건되었으며,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재건 및 중건을 하였다. 고흥향교는 지금의 고흥군 고흥읍 흥양길 90-29에 위치해 있으며 전남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선조실록』의 기사(5권, 선조4년-1571년 3월 13일 갑술 1번째 기사)에 따르면 유희춘은 1571년 초 전라감사에 제수되었다. 위 『미암일기』의 기록은 전라감사가 된 유희춘이 전라도 소속 고을을 순행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 일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전라감사 유희춘은 1571년 흥양읍치에 들려서 이틀 정도 머물며 업무를 본 뒤 고도로 이동하여 녹도만호가 준비해준 판옥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보성으로 넘어갔다. 이 내용을 통해 고도가 보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면서 배를 댈 수 있는 진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여러 사료들의 기록과 잘 부합한다.

 

1758년에 간행되고 1899년경에 전사된 『신증흥양지』에 수록된 흥양현 지도를 살펴보면, 위에서 검토한 『비변사인방안지도』에 수록된 흥양현 지도와 다른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신증흥양지』, 「흥양현지도」(지도 일부) - 자료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비변사인방안지도』에 표기된 지명 와우포(臥牛浦)는 『신증흥양지』에는 청암진(靑巖津)이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비변사인방안지도』의 고미도(姑味島:고도)는 『신증흥양지』에는 용등포(龍登浦津)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시 한번 고흥군 두원면의 현대 지도를 살펴보자.

 

1945년 고흥군 두원면 북부 항공사진 - 자료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위 지도는 1945년 고흥군 두원면 북부를 비행기에서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간척사업의 흔적이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해안선 모습을 추정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두원면 가장 북부에 있는 대전해수욕장 왼쪽에 용등포 나루터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이 ‘용등포’라는 지명이 현지에서 사용되고 있다. 1991년 고흥문화원에서 발행된 『마을유래지』는 이곳 지명을 ‘용등포(龍登浦) 나

루터‘ 또는 ‘용등개나루터’로 기록하고, 고흥군 대서면을 왕래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해보면 용등포는 조선시대에 흥양에서 보성으로 갈 때 거치는 진(津)에 해당하는 곳으로 생각된다. 위 항공지도를 보면 대전해수욕장 북쪽 가장 끝 부분에 섬이라고 부를만한 지역이 있는데, 현재 용등산(龍登山)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며 조선시대의 고도(姑島)로 추정할 수 있는 곳이다. 고도로 추정되는 용등산의 현재 주소는 전남 고흥군 두원면 대전리 4-1이다.

 

주) 2018년 4월 25일 본인의 네이버 블로그에서 흥양고도해전지에 대한 위치를 현 고흥군 남양면 우도라고 했던 주장을 수정하는 칼럼이다. 이순신 연구자로서 미흡했던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흥양고도의 위치를 새로이 비정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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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4.24 09:30 수정 2024.04.2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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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