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 칼럼] 공태원과 손죽도 왜변

윤헌식

손죽도 왜변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587년에 고토(五島)·히라도(平戶島)의 왜인들이 전라도 흥양현 손죽도(지금의 전남 여수시 삼산면 손죽도)를 점령한 뒤 남해안에서 많은 조선인을 납치해 간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해왜변(丁亥倭變)'이나 '손죽도 해전' 등 다른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손죽도 왜변은 1555년 을묘왜변이 발생한 이후 최대의 왜변으로서 단순한 침략 수준을 넘어 전면전의 양상을 보여준 전투이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고, 1590년 통신사 파견과 1592년 임진왜란으로 직접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동안 임진왜란에 가려 손죽도 왜변 관련 연구가 간과되어 온 면이 있지만, 다행히 얼마 전 이를 다룬 연구 논문(김덕진, 「1987년 손죽도 왜변과 임진왜란」, 『동북아역사논총』 29호, 2010)이 발표되어 이 전투가 벌어지게 된 배경과 경과를 자세히 규명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인 1592년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이 손죽도 왜변 때 전사한 녹도권관(사료에 따라 권관 또는 만호로 직책을 다르게 기록하였다.) 이대원과 함께 녹도의 쌍충사(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고흥쌍충사)에 배향된 일은 꽤 유명한 일화이다. 아마도 손죽도 왜변에 대해 알고 계신 분들은 쌍충사와 연관되어 이를 알게 된 분들이 많을 것이다.

 

​고흥 쌍충사 전경(1998년 이전) - 자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무공 이순신의 『임진장초』에도 손죽도 왜변과 연관이 있는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을 옮겨놓은 것이다.

 

『임진장초』의 「토적장(討賊狀)」(1593년 4월 6일)

 

2월 22일 본도(전라도)와 경상도의 복병 선장(伏兵船將) 등이 함께 왜인 2명을 사로잡아서 보고하기를, "왜인이 우리 배를 염탐하려고 당포 앞바다를 향해 왔기에 쫓아가서 붙잡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들이 하는 짓과 염탐하는 방법 등을, 정해년에 왜인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쇄환되어 돌아온 자로서 일본어를 잘 아는 본영의 진무(鎭撫) 공태원(孔太元)으로 하여금 종일토록 심문하게 하였습니다.

 

​위 기록에 따르면 전라좌도 본영의 진무 공태원은 정해왜변 때 왜인들에게 붙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인데, 포로가 되었을 당시 일본어를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선조실록』과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에도 손죽도 왜변 때 포로가 되었던 공태원 등의 이름과 그들이 쇄환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선조실록』의 해당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121, 선조33년(1600) 1월28일 계유 3번째 기사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차자(箚子)로 아뢰었다.

 

"신이 경인년(1590년) 사이에 비변사 낭청으로 있었는데, 그때 적추(賊酋) 수길(秀吉)이 우리에게 신사(信使)를 요구하면서 우리 나라의 반민(叛民) 사화동(沙火同)과 고토(五島)의 왜적으로서 누차 우리의 변경을 침략한 바 있는 신삼보라(信三甫羅)·긴요시라(緊要時羅)·망고시라(望古時羅) 등 세 왜적을 붙잡아 보내왔고(縛送), 이어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1백 30여 명을 다시 쇄환(刷還)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김대기(金大璣)·공태원(孔太元) 등 2인은 자못 영리하여 문자(文字)를 알고 있었습니다. ...".

 

​위 『선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공태원은 고토(五島)의 왜인들에게 잡혀갔다가 1590년경 다시 쇄환되어 돌아온 사람으로서 머리가 영특하여 일본말을 어느 정도 배워왔다. 이 기록은 위 『임진장초』에 나타난 공태원에 대한 기록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공태원의 이름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한 차례 언급되어 있다. 비록 그 이름은 공대원(孔大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황상으로 보아 공태원과 같은 인물로 보인다.

 

『난중일기』 1594년 5월 4일

 

경상우수사(원균)의 군관이 와서 “왜적 3명이 중선을 타고 추도에 온 것을 만나서 잡아 왔다.”라고 보고하므로 추고한 뒤에 압송해 오도록 일러서 보냈다. 저녁에 공대원에게 물어보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띄워 본토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바람을 만나 배를 제어할 수 없어서 표류하여 이 섬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원문] 慶尙右水使軍官來告 賊倭三名乘中船到楸島 相逢捉來云 推問後押來事敎送. 夕 問于孔大元 則倭等從風放船 向本土 中洋値颶風 不能制船 漂到此島云. 

 

위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왜적들을 추고(자세히 물어보거나 심문하는 것)한 뒤 압송해 오도록 지시하고 나서 저녁때 공대원에게 왜적들을 추고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이는 공대원이 일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의미하는 기록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선조실록』, 『임진장초』, 『난중일기』에 나타난 공태원에 대한 기록은 손죽도 왜변이라는 커다란 사건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 이해된다.

 

​[참고자료] 

김덕진, 「1987년 손죽도 왜변과 임진왜란」, 『동북아역사논총』 29호, 2010,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05.24 09:02 수정 2024.05.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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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