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나의 마음을 물들인다면

김태식

나의 지인 가운데 옷감에 천연염색으로 물을 들이는 사람이 있다. 자연의 색을 정성드린 자신의 노력으로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 내니 색깔의 마술사다. 자연에 있는 모든 식물이나 나뭇잎들이 소재라고 한다. 이를테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어원語源이 되는 쪽도 재료가 되고 감나뭇잎, 하찮은 잡초까지도 재료가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나는 색깔에 둔감해서 아름다운 색상의 정도는 잘 모르지만 작품이 곱고 예쁜 것만은 분명하다. 

 

작업장의 이름까지도 “내 마음 물들이고”이니 염색이 되어 나오는 작품만큼이나 예쁘다. 2인칭, 3인칭도 아닌 1인칭 나 자신을 물들이니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지 짐작이 된다. 곱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자신을 물들인 작품이니 타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천연염색에 관해서 문외한인지라 작품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간혹 볼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깊어진다. 간간이 무슨 무슨 대회에서 수상을 했다고 연락을 해 오는 것으로 보아 검증된 실력자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의 검단마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품고 멀지 않은 곳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이 보인다. 그곳에 ‘물들이는’이 있다. 이곳은 뭇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계절에 맞추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지인들이 몰려드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중년 부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색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연출가다. 

 

한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얼음이 얼어 있는 듯한 계곡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살을 에는 겨울에는 더운 여름을 느낄 수 있도록 시각적인 효과를 그려낸다. 봄에는 화사한 꽃잔치를 벌이고 가을에는 떨어지기가 아쉬워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여리고 가련한 낙엽을 휘날리게 한다.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계절이 없다. 다만 사계절이 좋을 뿐이다. 봄은 혹독한 추위를 인내하고 당당히 살아난 햇살이 화사해서 좋고 여름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것을 평등하고 솔직하게 보여 주는 듯 해서 좋다. 가을은 거둘 것이 있든 없든 희망적이고 감춰진 낭만이 있어서, 겨울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담금질을 해서 좋다. 그래서 나는 사계절이 공존하는 물들이는 곳이 좋다.

 

봄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계절이니 누구라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떠날 일이 있으면 그분의 작업장으로 놀러 오라는 얘기에 초대를 받았던 적이 있다. 작업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피어난 생화가 만발해 있었다. 전시실로 들어서자마자 무슨 재료로 물을 들였는지 또 다른 화사한 꽃잔치를 보고 함께 갔던 여러 사람들의 감탄은 한결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까?” 

 

몇 년 전 가을이 무르익고 있던 어느 날, 문학으로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과 그분도 함께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공원으로 낙엽을 보러 갔다. 이름 모를 나뭇잎들에 채색된 가을의 흔적에 탄성을 자아낸 적이 있다. 자연이 빚어낸 위대한 색상의 조각이었다. 

 

얼마 후 물들이는 작업장에서 그때의 모습과 비슷한 가을의 자취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샛노랗게 익어간 색깔에다 익어가다가 잠시 멈춘 빛바랜 연초록 잎, 아직 설익은 엽록소가 남아 있는 그 모습을 그대로 작업장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가히 그곳은 색깔을 창출해 내는 보물창고였다. 음악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악기가 연주되듯이 그분의 손끝은 색을 빚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이었다. 그 중년 부인의 눈에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재료로 보이고 지구상에 비치는 모든 색깔은 창출해 내고 싶은 숙제로 보이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원하든 원치 않든 여러 가지 환경에 의해서 나 자신도 모르게 물이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좋은 물이 들면 다행이겠건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고 또한 그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천연염색이 되는 것이다. 천연염색이야말로 재료 그 자체만으로 색깔을 만들어 낸다고 하니 이 얼마나 순수하고 거짓 없는 결과인가?

 

나 자신이 중년의 내 마음을 스스로 물들일 수 있다면 “부유하지 않아도 좋으니 가난하지 않게, 넘치지 않아도 좋으니 여유롭게, 명예롭지 않아도 좋으니 욕되지 않게” 물을 들이고 싶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

 

작성 2024.05.28 10:38 수정 2024.05.2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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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