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연작 詩] 새털처럼 가볍고 평화로운 오후 (107)

전승선

 

새털처럼 가볍고 평화로운 오후 (107)

 

 

낮게 흐르는 공기에

촉촉한 물기가 갇혀 있다가

동굴 천정으로 천천히 밀려나면서

손톱만 한 청개구리 한 마리가

무릎 위로 팔짝 뛰어 올라왔다네

이 작고 여린 생명이 오후의 평화를 깨며

살아있음의 환희로움에 춤을 추는 듯하네

살아서는 도달하지 못할 세상 끝이여

도달하지 않고서는 해결하지 못한 괴로움을

이제 다 벗어버리고 떠나려 한다네

저 청개구리와 공기와 고요와 나는

서로 얽혀 한바탕 신나게 춤을 추고 나면

이번 생은 여기까지 머물다 가려네

내 안의 야생을 깔끔하게 모두 풀어놓고

새털처럼 가볍고 평화로움에 잠들려 한다네

 

동굴 안은 순리자 도명의 숨소리로 차곡차곡 쌓여 있던 공기가 살짝 흐트러지곤 했다. 도명은 삶이 꿈인지 꿈이 삶인지 모르겠다며 지나온 일들을 잠시 생각하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평화를 본 적이 없었다. 죽음을 맞이하고자 늙은 몸을 이끌고 동굴로 온 지 삼 일이 지났다. 몸은 다 타버린 촛불처럼 사그라드는데 이상하게 의식은 아직 명료했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맑고 고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없이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네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건

육체라는 위대한 이성을 가진 인간뿐이지

인식하는 건 자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사람의 안에 비친 존재를 보는 것이라네

태어남이 욕망이듯 죽음 또한 욕망이지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는 끝없는 순환은

욕망이라는 연료가 있기 때문이라네

욕망이 사라지면 죽음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진다네

 

“이렇게 귀한 시를 노래하는 분은 누가인가요?”

“사람들은 나를 흰소라고 부르죠”

 

고요하고 평화로운 소년의 모습이 마치 흰소처럼 성스러워 보였다. 소년을 흰소라고 생각하고 나니 도명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있었다. 도명은 점점 생명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흰소의 말이 자꾸 귀에 들어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전승선]

시인

자연과인문 대표

이메일 : poet1961@hanmail.net

작성 2024.06.03 09:14 수정 2024.06.2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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