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갈색 머리 앤 각성하다

민은숙

그때는 미처 몰랐다. 지금이라면 맞장구칠 수 있다.

 

"아침은 언제나 흥미로워요.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상상할 거리도 넘쳐나니까요."

 

설레는 문장을 속삭여준 긍정 소녀가 있다. 곱게 딴 양 갈래머리 앤과 다이애나는 빽빽한 자작나무 숲에서 소중한 우정을 다지곤 했다. 고독을 벗 삼아 방콕을 좋아하는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이가 있다. 영이 이끈 곳은 화담숲이다. 경기도 광주로 설렘을 달고 갔다. 수국 축제가 한창인 시즌에 맞춰 꽃을 실컷 볼 수 있었다. 수국보다 가슴을 뛰게 한 복병이 나타났다. 귀족 같은 이름이라고 착각했던 자작나무다. 날 이끌어준 영이 천사 같았다.

 

대화가 흥미로 무르익으면 어떤 단어가 튀어나온다. 안에서 잠자던 아수라 백작이 모습을 드러낸다. 빨강 머리 앤인 듯, 감수성이 풍부한 내면이 마그마처럼 끓어오른다. 한참 노자를 공부할 때이다. 21세기에 맞는 사상이라며 열정적인 말들이 날아다닌다. 별안간 자작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껍질에 기름이 있어 불에 타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무지한 나는 귀족인 자작이라고 스스로 세뇌했었다. 나도 모르게 앞질렀다. 화담숲에서 본 자작나무가 튀어나왔다. 소설 속에서 알려준 숲에 환상과 상상의 나래를 폈다. 왠지 스산한 바람이 아닌 청정과 온정을 줄 것만 같은 그 나무가 내 몸 한 칸에서 명화로 파고들었다. 상상을 그대로 만족시킨 화담숲을 꺼냈다. 초롱초롱한 내 눈빛이 앤 셜리만 같았을까. 선생님은 자작나무 하면 원대리 숲이란다. 화담숲도 충분했다. 더 멋진 곳이라니 가슴이 벌렁거린다. 언젠가 가볼 버킷 리스트로 저장해 놓았다. 이런 주변머리 없는 날 꿰뚫어 본 걸까. 내 눈에 서린 불꽃이 강렬했을까.

 

무려 편도만 세 시간여를 달렸다. 하늘이 내린 인제란 표지판을 보면서 백화의 고고한 자태를 볼 두근거림이 함께 질주한다. 따뜻한 감성이 가득한 차 안은 정담과 덕담이 넘나든다. 어젯밤 기다림에 약간의 검색으로 얻은 정보를 되새김해 본다. 토요일을 비우란 말이 좋았다. 막내인 나는 변변찮은 중고차와 밤눈이 어두운 약점이 있다. 차마 선배님과 선생님께 운전하겠다는 말을 아낄 수밖에. 자신도 없고, 공연히 나서 헤맨다면 얼마나 낯이 뜨거워질까. 앞장서서 운전하시겠다는 K 선배님은 장염을 앓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아뿔싸! 선생님이 나섰다. 연장자이고 우리들의 멘토다. 이렇게 송구할 수가 없다.

 

가족이 있어도 고아인 빨강 머리보다 환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반쯤 남은 물 잔을 보며 앤이 긍정을 흩뿌릴 때 나는 부정을 내게 뿌렸다. 어쩌면 니체의 위버멘시와 같은 앤이 이상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긍정은 긍정을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는 말을 최근에 체감하고 있다. 부메랑은 아프게 찔렀다. 안에서 자물쇠를 걸고 책임감이 강한 나는 세 마리 토끼를 잡고자 몸을 함부로 썼다. 그것은 부정의 힘을 쓴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물이었음을 깨닫는다. 

 

기침을 속눈썹처럼 달고 살았다. 맘대로 되지 않는 삶에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비우기 시작했다. 비우고 덜어내고 내려놓는 과정에서 속상하고 서글펐다. 유추해 본다. 한약과 양약으로도 치유가 불가했던 모진 기침이 잠든 이유를. 오랫동안 방치했던 본성을 억압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기침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던 게다. 싹은 부정을 먹고 자라 기침으로 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오감이 날 살리고자 기침으로 뚫은 것이리라. 

 

이젠 긍정이 조금씩 자리 잡고 싶어 한다. 갈비뼈가 흔들리고 복근이 드러나면서 부정이 꼬리를 감추었다. 덜어낼 만큼 했다고, 그만 비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늘에 오래 구겨져 있던 어릴 적 꿈이 빼꼼히 내다본다. 예전 같으면 엄두 못 낼 도전장을 내민다. 그 뿌리는 타고 긍정을 깨워 기특하다는 메아리로 받았다.

 

입이 쩍 벌어진다. 원대리 숲은 그야말로 하얀 사슴의 서식지 같다. 화담숲이 정원이라면 이곳은 숲이다. 유화로 그린 듯한 품위가 느껴지는 자작나무는 껍질이 얇게 벗겨진다. 속살은 반들반들 백반을 바른 듯한 하얀 몸을 드러낸다. 학처럼 고고한 자태는 키가 늘씬하다. 영화 아바타의 나비 부족처럼 쪽 빠진 몸은 그야말로 천상계다. 이젠 남부럽지 않다. 평생 친구와 마릴라 선배님들도 계시다. 감격스러운 것은 제대로 가는지 지켜보며 톡톡 쳐 본 궤도에 올려주는 선생님이 생겼다는 거다. 눈빛만으로 기꺼이 희생을 자처하는 꼰대 아닌 열린 어른이시다. 

 

육십 년 수령을 사는 자작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자라 비옥해지면 스스로 생을 내려놓는다. 배부른 돼지는 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배부른 문인이 되지 말라는 의미일까. 이곳에 나를 부른 자작나무의 깊은 뜻이리라. 청량한 바람을 부쳐주는 백화를 본다. 앉아서 글 쓰는 지방을 축적하지 말라는 바람을 읽어보며 나는 갈색 머리 앤 커스버트로 거듭난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코스미안상 수상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당선

환경문학대상
직지 콘텐츠 수상 등

시산맥 웹진 운영위원
한국수필가협회원
예술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sylvie70@naver.com

 

작성 2024.06.19 09:41 수정 2024.06.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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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