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코골이

이순영

나는 이 빌어먹을 조선을 생각하면 막 가슴이 쿵쾅쿵쾅한다. 뭣 때문에 조선은 망하지 않았는가. 진작 망하고도 남을 조선에서 겨우 살아남은 천재들은 조선이라는 끊길 듯 끊기지 않는 명줄을 잡고 엄혹한 시간 위를 광대처럼 줄타기하며 살아야 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빌어먹을 조선에서 정치인으로 학자로 예술인으로 산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조선 후기에 우뚝 솟아난 그를 우리는 완당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추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김정희라고 부르기도 한다. 추사체라는 완벽한 문화의 아이콘이 된 그는 꺼져가는 조선 최고의 석학이자 예술인이었다. 이 어른을 어찌한단 말인가. 

 

추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유배다. 현종을 등에 업고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던 시절 추사는 윤상도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의 시간은 추사에게 있어 가혹하고 또 가혹한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예술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 실현된 시간이기도 했다. 제주도 유배에 추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는 서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 만든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역사는 아이러니로 완성되는 법인가 보다. 추사가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그의 예술혼은 어디에서 폭발했을까. 

 

평생동안 코골이에 넌더리 났네

옆에 누워 편히 잠을 잘 수 없으니까

간과 폐까지 갑갑해 견딜 수 없어

속으로 열받는 것을 거듭해서 먹이니

 

내쉴 때는 수레바퀴 소리 같고

가파르고 험한 길을 밀고 끌어가는 듯

굳이 삼킬 때는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듯

참으로 코로는 쉰밥을 향기로워하듯 빨아들이네

 

거칠게 올라가며 뇌 속을 채우려는 듯

내뿜으며 쏠 때는 뺨에 구멍이라도 낼 듯

얼핏 들으면 대들보가 혹시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

다시 들으면 산이 혹시 흔들리는 게 아닌가 근심

 

고개를 들면 노나라 꼽추처럼 사납고

웅크리면 초나라 여인처럼 쪼그리네

갑자기 굳은 나무를 베는 것처럼

톱니가 잘근잘근 물고 파고드는 것 같네

 

코골이 옆에서는 살 수 없다. 스트레스의 완성판이 코골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혼해야 하는 덕목 중에 코골이는 높은 순위에 들어간다. 추사는 코골이에 넌더리를 치면서 간과 폐까지 갑갑해 견딜 수 없다고 토로한다. 고개를 들면 노나라 꼽추처럼 사납고 웅크리면 초나라 여인처럼 쪼그린다고 질책한다. 한마디로 열받고 스트레스를 받아 미치겠노라고 난리다. ‘코골이’는 인간의 품격을 가장 리얼하고 생생한 사실을 익살스럽고 재밌고 명쾌하게 표현한 시다. 

 

짜증 나고 미칠 것 같은 조선 말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자 퍼포먼스로 코골이를 써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마음이 편안하게 나아갈 길이 있기는 했을까. 어디 하나 마음 둘 곳 없는 그 사회에서 증오심으로 불타오르기에도 모자랄 판에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투덜거리지만 고심이 묻어있고 진심이 묻어나 있다. 102행의 장시 ‘코골이’에는 진정한 사유와 공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던가. 온갖 군상들이 모여 이일 저일 얽히고설켜서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있듯이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라고 그런 거라고 시로 일갈한다. 

 

추사 김정희는 1786년에 태어나 1856년에 사라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예가이며 문학가이고 금석학자, 고증학자 그리고 화가였다. 지독히도 많은 업적을 남긴 불운한 천재이자 예술가였다.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쓰임새를 다한 조선의 성리학을 비판한 선구자였으며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다. 나무나 돌 또는 금과 옥에 글자를 새기는 전각을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 선비의 벗인 차를 좋아해서 조선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와 백파스님을 벗으로 두고 친하게 지냈다. 

 

조선에서는 정치적 견해가 다르거나 권력을 쥔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 유배를 보냈다. 그나마 죽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 갔다가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고 1851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예순여덟에 풀려나 아버지 산소가 있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글과 그림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일흔 살이 되던 해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코골이’ 시 중에 마지막 연에서 추사 김정희는 천년의 기상까지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쯤 되면 ‘코골이’의 승리다. 

 

마음껏 코 고는 소리는 

늙은 한비자도 놀랄 지경이고

물 끓듯 내뿜는 소리는 

절간의 담담한 적막을 비웃는 판이네

깊이깊이 캄캄하고 곤한 그곳으로 빠져드니

천년을 내려온 기상을 느끼리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4.06.20 10:37 수정 2024.06.2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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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