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축제장을 지나니 품바타령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누더기 옷차림을 한 출연자가 목청 높여 노래하고 만담도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구경하느라 신명이 났다. 나도 잠시 구경을 하니 공연은 노래 몇 곡 부르고 물건을 사라는 얘기가 훨씬 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에 고향에서 간간이 볼 수 있었던 공연이 떠올랐다. 언제나 넓은 빈터가 출연자들의 공연장이었다. 객석이라고 해야 가마니를 군데군데 깔아 놓은 것이 전부였다. 출연자들은 심청가 판소리와 춘향가 중에 나오는 사랑가를 부르곤 했다. 흥부가의 박타는 대목과 화초장타령을 마무리하면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 줬다. 관객들을 울렸다가 웃겼다가 했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1960년대 후반에 어른들은 그 공연장을 ‘나이롱 극장’이라 불렀다.
그 시절에 악극단을 따라다니는 예술가들도 가난을 피해 갈 수는 없었는지 각자 창唱을 몇 곡하고는 관객들을 상대로 약을 팔았다. 그때의 관객들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우리 같은 중학생은 반갑지 않은 구경꾼이었다. 하지만 나와 몇몇 친구들은 통영 명정동의 빈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연 구경을 간간이 하곤 했다.
‘이수일과 심순애’ 신파극을 하기도 하는가 하면 여성들끼리 남자 분장을 하여 벌이는 국극공연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우리가 잘 모르긴 했어도 그 당시에 출연자들 대부분이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공연 중에는 이른바 ‘쟁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끼를 발산할 곳이 흔치 않았던 터라 나이롱 극장 같은 곳은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거침없이 내뱉는 만담에는 정치인을 풍자하여 비하하는 내용이 있기도 했다. 때로는 돈 많은 부자들의 비상식적인 욕심이나 빈부의 격차를 나무라는 사회상을 연출해 내기도 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80세를 넘긴 그분들이 얼마 전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옛날 고생했던 얘기를 하면서 통영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다는 내용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어릴 적에 내가 보았던 나이롱 극장의 출연자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요즈음의 길거리 공연을 간혹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그 공연장을 왜 나이롱 극장이라 했는지 궁금해졌다. 정확한 영어식 발음은 ‘나일론’이고 ‘나이롱’은 일본식 발음이다. 이것은 석유에서 뽑아내어 아주 편리한 옷감과 생활 집기들을 만들었다. 나이롱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네 부모님들은 무명 치마저고리에 불편한 옷들을 입었다. 하지만 나이롱 제품의 등장으로 생활용품들의 수명이 길어졌다. 그런데 이토록 편리한 옷감과 나이롱 극장은 무슨 관계일까?
허풍을 떨고 여기저기 붙었다가 변절을 잘하는 사람이나 정치인을 나이롱이라고도 했다. 요즈음에는 아프지도 않은 엉터리 거짓 환자를 나이롱환자라고도 한다. 이러한 쓰임새로 본다면 나이롱은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닌 것 같다. 따라서 그 당시의 나이롱 극장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신명 나는 공연으로 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까지는 정말 좋다. 하지만 그 흥겨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관람객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돌아다니면서 약을 팔았으니 거의 강매에 가까웠다고 봐야 한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노인들은 건강에 좋다 하면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얄팍한 상혼이 있었던 것이다. 공연을 하는 그분들이 빠트리지 않는 말이 있었다.
“지금 아무리 자식들이 효자라고 해도 나중에는 아무도 필요 없어. 내가 아파 죽으면 그만이니 지금의 건강이 최고야.”
공감하는 박수가 쏟아지면 덧붙인다.
“죽을 때 돈 가지고 갈 거요? 지금 살아 있을 때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지금까지 키워 준 자식들한테 용돈 받아서 보약 사 먹어야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충동구매를 부추긴 과장광고를 한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파는 약이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은 뻔하다. 오히려 부작용이 없었다면 다행일 듯 하다.
연세가 많아 별다른 소일거리가 없었던 노인네들은 매일 같이 열리는 나이롱극장에서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짐작하건데 노인들이 구경만 하고 약을 사지 않으면 얼굴이 익은 약장수들이 적지 않게 눈치를 했을 것 같다. 수입이 없는 노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돈을 요구했을 것이고 아들과 며느리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용돈을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 귀갓길에는 믿을 수 없는 약을 사들고 오면 집안에서 냉랭한 갈등이 빚어졌을 것 같다.
현시대에는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나라가 부유하고 강해졌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에도 나이롱 극장은 존재하고 있다. 남을 속이고 남의 입에 들어가 있는 것까지도 빼앗아 먹으려는 안타까운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공연을 하던 분들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할지라도 약을 파는 것은 분명 나이롱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는 가마니를 깔고 앉았고 지금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는 것뿐이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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