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전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해는 서산으로 지는 것이 아쉬워 뙤약볕을 막 쏟아내고 있었다. 풀들도 더위에 지쳐 축 처진 모습으로 보아 8월 한 낮의 더위는 수월하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집을 향해 “실례합니다”를 반복해도 대답은 없다. 조금 열려 있는 대문 틈으로 집안의 마당을 들여다보니 텃밭에서는 고추와 상추가 더위에 지쳐 잎의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왔던 집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다.
3개월 동안 부산에서 거제로 파견근무를 하면서 칠천도를 꼭 한 번 방문해서 고등학교 동기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려야 했건만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말았다.
고교 시절, 통영에서 이곳으로 갈 때 버스를 타고 가면 3시간 남짓 걸렸다. 하지만 몇 년 전에 개통된 연육교 덕분에 몇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쳤으니 죄송할 따름이었다.
“이 댁에 사시는 할머니 혹시 어디에 갔는지 아십니까?”
밭에서 일을 하는 분께 물으니 저쪽에 있는 노인회관에 계실지 모른다며 말하는 아주머니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젊고 예뻤다. 동네 할머니들만 다섯 명이 편안하게 누워서 그 할멈 오늘은 오지 않았단다. 이 밭 저 밭으로 논으로 찾아 헤매기를 1시간 정도하고 나니 뙤약볕은 나의 얼굴을 금세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해가 지면 오시겠지 생각하며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수건을 쓰고 세월의 깊이가 드리운 굽은 허리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바로 알아 차리고 인사를 드리니
“안면은 있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혔다.
“그래 맞다”
하시며 나를 덥석 안아 주신다. 큰절을 올리겠다고 안방에 앉으시라고 하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영락없이 천진난만한 아이의 자태다. 골패인 얼굴의 주름과 쭈글쭈글한 손마디 마디로 많은 자식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7남매 중에 둘째 아들을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 보냈을 때는 얼마나 양식이 부족했을까? 거제의 본섬에서도 떨어져 있는 ‘칠천도’라는 조그마한 섬에서 아들의 학비를 충당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의 눈이 흐려졌다.
많이도 먹었던 고교 시절에 몇몇의 동기들이 어울려 칠천도에 놀러 갔을 때 우리의 먹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시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우리는 양식 걱정을 하셨을 어머니의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앞뒤 가리지 않고 먹기만 했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 덩그러니 섬에 남아 텃밭을 일구며 혼자 살아가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아버님 돌아가신지 10년이 되었지요?”
아니다, 12년 됐다고 또렷이 기억하시는 것은 아직도 건강하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덧붙여
“나이 들면 죽어야지. 그래도 영감이 이 집을 짓고 한 달 정도 살다가 죽어서 조금은 다행이다”
말끝을 흐리신다. 어느 통계에서 보여주듯이 노인에게는 돈을 드리는 것이 최고라 했다. 내가 많지 않은 용돈을 준비해서 건네 드리니
“내가 이 돈을 받아도 되겠나?”
“아닙니다. 제가 이 정도 용돈은 드릴 형편이 됩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미리 하고 나온 약속에 떠밀려 일어서려는 나를 잡으시며, 이대로 가면 서운해서 안 된다고 소주 한 병을 가져오신다. 낮이고 운전을 해야 하므로 술을 못한다고 하니 기어코 음료수 한 병을 권하신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며 슬퍼하시기도 했다.
지는 해를 뒤로 하고 돌아가려는 나에게 동기 어머니는 차가 어디에 있느냐며 따라오신다. 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자식들도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스쳐 가듯 왔다가 곧 떠났을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으면 나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 하실까?
1시간이 짧게 느껴졌고, 쉬이 돌아서지 않는 발길이었지만 재촉하지 않을 수 없어 자꾸만 뒤 돌아보았다. 도란도란 지난 얘기를 더 해 드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인생은 모두 아쉬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 만큼 나도 다음에 또 오겠다는 불확실한 약속만을 남긴 채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