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 조선 조정은 일본군에게 투항했던 백성들이 다시 조선으로 되돌아오도록 회유하거나 이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전쟁은 기아와 질병을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상황을 조성한다. 이러한 환경에 처했던 힘없는 백성들의 처지를 십분 고려하여 조정이 정책을 입안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선 조정의 이러한 정책을 입증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1593년 9월 선조가 백성에게 한글로 발급한 유서이다. 현재 보물 제951호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로 알려진 이 문서는,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선조가 그들이 되돌아오기를 회유하는 내용을 한글로 써서 발급한 유서이다.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문화재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선조국문유서」는 임진왜란 시기 조정의 정책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조선 중기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선조국문유서」에 나타난 정책은 유서 반포 이후 많은 지방 관리와 백성에게 어느 정도 유효한 영향력을 보여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는 찾기 어렵지만, 『선조실록』의 1596년 기사에 「선조국문유서」의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사이다.
『선조실록』 권64, 선조28년(1596) 6월 14일 을묘 4번째 기사
통제사 이순신이 급히 조정에 보고하기를,
"경상도 수군 윤업동 등 4명이 적에게 투항했다가 본진으로 도망쳐 귀환했기에 적의 정세를 물어보았더니 <<중략>> 투항한 백성들이 계속 도망쳐 탈출해 오는데, 이러한 때에 (이들을) 갑자기 중한 죄로 다스리는 것은 실로 좋은 계책이 아니기에 본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어 당분간 위무하는 뜻을 보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선조)이 이를 비변사에 내려보내니 비변사가 답변하기를,
"수군 윤업동 등이 나라를 등지고 적에 투항하여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였으니 지극히 해괴한 일로서 중한 죄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투항한 무리들이 참으로 많은데, 그런 무리들이 탈출하려고 해도 죄가 두려워 망설이고 있다고 하니, 중죄로써 다스리는 것은 그 마음을 고쳐 먹고 근본으로 돌아오려는 뜻을 꺾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이순신의 조처가 과연 사리에 합당하니, 이후 탈출해 돌아온 사람들은 이러한 예에 의거하여 본래 거주지로 보내고 특별히 위무하는 뜻을 더하도록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선조)이 따랐다.
위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통제사 이순신은 일본군에게 투항했다가 돌아온 수군 윤업동 등을 본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낸 다음 그 조처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만일 「선조국문유서」의 정책이 미리 실행되지 않았더라면, 통제사가 조정에 먼저 보고도 하지 않고 임의로 윤업동 등을 처리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아무튼 위 『선조실록』의 기사에 보이는 바와 같이 조정은 공문을 보내어 투항하는 백성들에 대한 정책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밝혔다. 다음은 이순신의 1595년 『난중일기』 기록으로서 이러한 조정 정책이 현장에서 실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난중일기』, 1595년 9월 3일
웅천에서 (일본군에게) 투항했던 사람인 공수복 등 17명을 회유해 왔다.
[원문] 熊川投附人孔守卜等十七名誘來.
『난중일기』, 1595년 9월 23일
웅천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인 박록수와 김희수가 와서 만났는데, 적의 정세를 알려주기에 각각 무명 1필씩 나누어 주고 보냈다.
[원문] 熊川被擄人朴祿守金希壽來謁 兼道賊情 故木各一疋 分給而送.
『난중일기』, 1595년 9월 27일
안골포에서 적에게 투항했던 사람 230여 명이 나왔는데, 배의 수는 22척이라고 우수(안골포만호)가 와서 보고하였다.
[원문] 安骨浦附賊人二百三十餘名出來 船數則二十二隻 禹壽來告.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이상규, 『한글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 사람들의 삶』, 2014, 경진출판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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