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피비린내 나는 왕족과 왕씨족 숙청
이씨 왕조 건국의 토대는 정도전이 세웠다. 고려가 무너지고 새로운 조선의 건국에 반기를 든 유장 50명과 유신 72명, 모두 120명이 화형으로 처형당하였다.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가 임금을 친 역적질에 분노하며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절을 내세운 유신들이 피의 숙청을 피해 개경을 등지고 두문동에서 항거하다가 불에 타죽었다.
만경대는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뀌었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조선이라고 지칭하고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신군부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부자를 삼척으로 안치시키고 왕씨 왕족 멸살기를 단행하였다. 왕씨의 씨를 말리는 대대적인 필살기가 시작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만경대 중광전에 왕손인 왕강, 왕격, 왕승보를 불러 세웠다.
“목숨은 살려줄 테니 만경대를 떠나 내가 마련한 곳으로 가서 편히 사세요.”
“그곳이 어디란 말이요?”
“서해의 덕적도, 용유도로 가서 왕씨족 끼리 편안하게 사세요.”
태조는 그들을 위로한 뒤에 왕강은 공주로, 왕격은 안변으로, 왕승보는 안동으로 귀양보내고 왕족 350명을 큰 배에 분산하여 덕적도, 용유도 자연도로 보냈다. 그들을 실은 배가 서해 섬으로 가던 중에 배 밑창을 뜯어 물이 차게 하여 모두 바다에 수장시켜 죽였다. 일단 왕가 처단은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흩어진 왕씨를색원하여 남쪽 거제도와 돌산도로 격리 유배시켰다. 이방원은 순군부(검찰)에 명령하였다. 500여 명이 거제도와 용유도, 돌산도로 가다가 수장되었다. 그러나 王씨 일가는 성을 玉씨 全씨 등으로 바꾸어 순군부의 눈을 피해 연고가 있는 고을로 숨어들어 간신히 목숨을 건재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방원은 순군을 유배지로 보내 왕씨를 감시하고 아무도 모르게 처결하라고 일렀다. 순군들은 계속 숨어있는 왕씨 색출 제거 운동을 강행하여 씨를 말렸다. 대간과 형조는 한술 더 떠 대대적인 반군, 반신 척결에 나섰다. 역대, 새로서는 어느 왕조에서 볼 수 없이 조선은 피로 만들어진 왕조였다.
고려가 사라지던 날 개경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 시신이 뒹굴었다. 혁명군은 도망가거나 피난 가는 행렬을 반정 세력으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처단하였다. 거리마다 피비린내 나는 참살은 계속되었다. 순군 병사들이 잔인무도하게 백성을 반정 세력으로 몰아 처형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공포에 떨며 숨을 곳을 찾았다.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데 정처 없이 송도를 떠나는 인파가 늘어만 갔다.
“개경으로 돌아가라.” 혁명 순군대가 길을 막았다.
“조선이 싫어서 떠나는 고려의 백성이니 가는 대로 가게 행로를 막지 마라.”
“대세는 끝났다. 너희가 가는 곳, 서는 곳은 모두 새 조선의 땅이다. 좋든 싫든 그대들은 조선이 백성이니 새로운 주군을 섬겨야 한다.”
2. 피바다 개경을 떠나는 도피행렬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한 4년 후 1392년, 무력 혁명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창설했다. 새 정부 순군부는 공양왕을 폐위시켜 유배 보내고 정몽주와 최영 장군을 처형하고 정도전, 권근, 남은, 배극렴 등의 신진 유학파들과 신진 무장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로운 이씨 왕조를 건국하였다. 이렇게 위화도 회군 군은 개경을 피로 물들여 장악하였지만 고려는 쉽게 망하지 않았다. 개경 방수대 1만 여 군은 끝까지 혁명군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남해의 왜구 방어 수군대도 강하게 저항하였다.
‘우린 절대 반역군에게 나라를 내줄 수 없다.’ 왜구를 지키던 수군들이 일제 단결하였다. 최영의 개성 방어군과 남해의 왜구방어 합포만호진과 진례만호진 수병들이 혁명군에 맞섰다. 당시 전력은 요동 정벌군은 6만명, 왜구 방어 수병대는 2만, 개경 방수대 1만 명이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혁명군은 무자비하게 고려 왕정을 정복하고 개선장군처럼 군림하는데 당할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개경 방수대와 남해 수군사령부에 명하였다.
“고려는 없는 나라다. 새 나라에 충성하라.”
“우린 요동 정벌군의 반란에 동조할 수 없다.”
“혁명 정부에 협조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개경 방수대는 필사적으로 혁명군과 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왕과 최영등 수천의 병사와 군신들이 죽임을 당했다. 혁명군은 왕정을 쓰러뜨린 후 저항하는 백성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개경은 피비린내는 참살의 형장이 되었다. 혁명군에 패한 방수사 50여 명의 유장들은 남은 병사를 데리고 만수산 두문동으로 피신하여 방어망을 구축하고 혁명군에 맞섰다. 개경을 떠난 유장들과 유신들은 두문동에서 결사를 다짐한다. 배극렴. 조준. 이방원. 박위의 순군부 대간들은 두문동 저항군 척살에 나섰다.
혁명 왕조를 거부하는 인파가 개경을 떠나고 있었다. 만월대 왕족들은 이미 도성을 떠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두 왕조를 섬 실수 없다는 충신 유장 50명과 직제학, 판서 등 문신 72명 도합 120명이 개경 북쪽 10리 밖의 부조현 고개에서 관복을 벗어 던지고 만수산(고봉산)으로 들어가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저항 운동을 폈다.
유장 50명은 동쪽의 종봉산에 진을 치고 문신 72명은 서쪽 고봉산에 은둔하였다. 동쪽의 유장들이 집결한 곳을 동문동, 서쪽의 문신들이 은거한 곳을 서문동이라 하였다. 이들 유장과 문신들은 동서문동에 문을 닫고 진지를 구축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혁명군에 대항하였다.
동문동의 유장은 오영, 맹사평 장군이 지휘하였고 서문동은 직제학 박문수가 지휘하였다. 이들은 사생결단의 의지로 결사대를 만들어 전 국민 반혁명 세력을 구축하였다. 두문동 결사대는 최영의 휘하 장수와 평장사 유신 공은(孔㒚)이 주도하여 기획하였다. 공은은 형 공부(孔俯)가 혁명 정부에 가담하여 한성판윤이 된 것을 비관하며 형 공부 몰래 두문동 결사대를 창설하였다. 평장사 공은은 맹사평 장수와 박문수 판서를 불러 결사를 다짐하였다. 두문동 결사대는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다. 혁명 순군부는 두문동에 불을 질러 120인의 결사대를 불에 태워 죽였다.
3. 남해 수방사 수군의 저항
왜구 잡던 합포만호진과 진례만호진 수방사 병사들이 결사의 뜻을 밝히고 위화도 회군 혁명군에 저항하였다. 요동정벌대가 대부분의 수군을 착출해 간후 왜구 방수사 수병들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경상도 웅천 합포(마산)엔 충렬왕때부터 대마도 정벌대가 강력한 수군으로 왜구방어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순천 진례 만호진엔 왜군을 격파했던 정지 장군의 삼일포 고려 해군 사령부 수병이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수방사 수병들이 혁명군의 횡포에 저항하였다.
당시 경상도 순문사와 전라도 순문사 수군이 2만여 명이 합포와 여수 진례만호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 군은 요동 정벌군에 밀려 하대를 받으며 굳건하게 왜구의 침략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 반란 세력은 이들 수군 방어사에 명하여 혁명 정부에 동조하라 하였다. 이에 5도 도문순사들이 반기를 들었다.
“누구에게 명령하느냐? 우린 절대 혁명 정부에 동조할 수 없다. 우린 왜구를 막는 고려의 병사다.”
최운해 경상도 도문수가 항변하였다.
“그렇다면 너의 지휘를 박탈할 것이다.”
혁명 순군사 박위가 위협하였다.
“뭐라, 네놈이 뭔데 지껄이느냐? 절대 우린 이씨 왕조에 충성할 수 없다.”
충청도 도문순사 이귀철이 항변하였다. 전라도 도문순사 김빈길과 김영렬 경기도 도문순사는 합동하여 혁명정부 순군부를 격파하였다. 기세를 살려 개경으로 진입하며 혁명군에 맞서고 있었다. 5도 총도통사 김사행은 이들을 설득하여 혁명군에 가담하라 명했다.
“우리는 고려에 충성하는 병사다. 반역군과 항전을 불사할 것이다.”
이성계는 이들도문사를 처벌하라고 일렀다. 김사행 5도 통제사는 이들 도문사를 잡아 유배 보내고 자연도에서 모두 살해해 버렸다. 그래도 가장 강한 저항 세력은 순천의 정지 장군이 만든 수군 사령부(진례만호진)군이었다. 5도 총도문사가 각도 도문사를 처형하자 왜구가 날뛰기 시작하였다. 왜구가 3도에 침입하여 수장이 없는 상태에서 수군 5,000여 명이 살해하였다.
왜구의 침략을 막지 못하면 혁명 정부가 위험에 처했다. 김사행은 혁명군을 왜구 방어병사로 내보내 간신히 왜구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박위는 남해의 수방사 수군을 다독여서 대마도 정벌을 감행하였다.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정벌을 성공하고 하대시한 방수구병의 사기를 높여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례만호진 수군들은 절대 혁명 정부에 동조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전라 도문사 김빈길이 처형당하자 여수현의 수장인 오흔인 현감이 결사적으로 순군부와 항전을 다짐하였다. 이곳에 유배와 있던 평장사 공은이 적극 이들을 도왔다. 그러나 배극렴, 박위 순군부는 무자비하게 이들을 감금하고 학살하였다. 특별 대간과 형조가 나서서 이곳 현령인 오흔인을 체포하고 반군을 제거하였다. 현령 오흔인의 저항으로 이성계는 여수현을 반역의 땅이라고 폐현시켜 순천에 부속하였다.
여수 진례산은 김총 성황신을 모시는 산으로 신라 진례 만호 수방 본영으로 견훤과 박영규, 왕건이 이곳 방수사에서 모의하여 신라를 치고 고려건국을 도모한 충절의 고장이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은 끝까지 조선에 반기를 들다가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혁명군은 순군부를 강화하여 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마침내 칼과 피로 얼룩진 조선이 건국되었다.
4. 불타 죽은 두문동 72인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질러 고려 유장 50명과 유신 72명 합 120명을 태워 죽였다. 1740년 영조가 개성을 여행할 때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 슬퍼하며 두문동 72인의 충절비를 세워 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정조가 1783년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이들을 추모하였다. 불에 타 죽은 유장 50인은 이름조차 없이 사라지고 두문동 72현의 이름만 알려졌다. 72인의 충절은 순절반(殉節班), 정절반(靖節班), 항절반(抗節班)으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두문동에서 불에 타죽은 유장들의 명단은 없고 불분명한 인사가 끼어 있었다.
정절반은 김주(예의 판서). 나천서. 민유. 전조생. 김전. 조공. 전자수. 노신. 신아. 홍재. 신덕린(예조 판서). 맹유(이부상서). 이춘계(호조상서). 양유. 송교.김약. 선윤지. 민유의. 이조. 민보문등 20명의 현신이고 순절반은 정몽주(문하시중), 이종학. 신득청(이부상서). 차원부. 이초. 홍노. 하경. 손등 8명이었고, 항절반은 이생. 길재. 최윤덕. 최첨노(내시령). 도웅. 공은(문하시랑). 이중인(문하시랑). 이옹(문하시중). 남을진. 장안세. 맹희도(한성윤). 최양. 조호. 최유강. 박덕공 15명이었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장과 유신 중에 두문동에서 불에 타죽은 72인의 유혼을 임선미의 후손 임하영이 앞장서서 1934년 개성에 두문동 서원을 창건하면서 불사이군의 대의로 순절한 72인을 두문동 서원에 모셨다.
역사는 고려 두문동 72인 충절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