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에서
나는 대학 시절에, 사범대학에 다니면서도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철학자가 되어 이상 사회를 쓰리라.’ 이상 사회(理想社會), 플라톤의 ‘이상 국가’ 강의를 들으며 생각하게 되었다. ‘책 대로만 하면 우리 사회는 유토피아가 되는 거야!’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교조주의(敎條主義)가 되고, 독재, 파시즘으로 가는 것 아닌가? 얼마나 많은 종교와 사상이 처음의 정신을 잃어버리는가! 물은 고이면 썩게 되어 있다.
나는 그 후 시와 인문학,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나의 무서운 생각’을 알아차렸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안개 같은 것이다. 인간은 ‘한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어떤 사이비 종교에 빠지듯이.
인간이 한 생각에 빠져 살아가면, 안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실제 세상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 된다. 모든 이론을 섭렵한 파우스트는 길을 잃어버린다. 그때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 그에 의해 다시 푸른 생명의 나무가 된다.
나도 말갛게 깨어나는 나를 보았다. 그렇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 그런데, 유토피아(Utopia)의 어원을 살펴보면,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상 사회란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 사회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진흙에서 연꽃을 피울 수 있어!’
MBTI 성격 검사를 해보니, 나는 이상주의자(INFP)였다. ‘아, 그래서 내가 그리도 이상향을 찾아 헤맸구나!’ 나는 차츰 삶 속에서 이상 사회를 찾아갔다. 나는 나의 일상에서 이상향을 찾게 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다른 장소’라는 뜻이다. 푸코는 말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상과 다른 현실의 공간에서 발견되지만, 다른 공간들과는 그 기능이 상이하거나 심지어 정반대인 단독적 공간이다.”
아이들의 놀이 공간을 예로 들 수 있다. 아이들은 놀면서 그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침대와 의자를 두고 이불을 올려두면 아이들에게는 비밀기지가 된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무언가를 쌓아둔 공간일 뿐이다.
이것이 헤테로토피아다. 비밀기지는 아이들에게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에서는 시간이 축적되지 않는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공간에 가게 되면, 꿈에 빠지게 된다.
나의 헤테로토피아는 요가와 명상이다. 나는 요즈음 하루에 한두 시간씩 요가와 명상을 한다. 창문을 열어놓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나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 홀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나와 천지자연이 하나인 세상, 삶과 죽음이 사라진 세상, 오롯이 내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요가와 명상을 끝내고 나면, 다시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 세상 속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삶과 죽음이 있는 이 세상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내 가슴에 나의 헤테로토피아가 은은히 빛나니까 이 세상이 견딜만하다. 나의 헤테로토피아는 점점 확대된다. 인문학을 강의할 때, 글쓰기 모임에서, 술자리에서, 나의 헤테로토피아가 펼쳐진다.
그럼 나머지 시간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알아차림의 명상을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면, 한순간에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다. 나는 이제 이런 방법으로 나의 이상 사회를 찾아간다. 원시인들은 신화(神話)에 의해 이 세상을 헤테로토피아로 만들었다.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들은 신화를 만들어 무한한 신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
유한의 삶과 무한의 삶을 하나로 연결하여 살아간 그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삶과 죽음이 두 개로 분리되어 현대인의 삶은 지리멸렬해진다. 다시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복원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약육강식의 생지옥을 사랑 가득한 유토피아로 화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보드라운 피부의 황토, 풀풀 날아다니길 좋아했죠. 호랑나비, 밀잠자리, 썩은 쥐 뱃속에 집을 마련한 파리, 두루마리 휴지, 도둑고양이들과 친했죠
- 권정일, <공터의 행복> 부분
우리는 누구나 유토피아의 경험이 있다. 생각만으로 이 세상을 자신의 세상으로 만든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진 땅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고이 잠자고 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언제고 이 세상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