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걸망포’라는 지명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특히 1593년 일기에만 5차례나 언급되어 있다. 걸망포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지명이었을까.
1593년 2월 10일 ~ 3월 6일(음력) 웅포해전을 치른 조선 수군은 견내량 남쪽 한산도 주둔지로 돌아왔다. 걸망포는 웅포해전 직후 『난중일기』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1593년 3월 6일(신유) 맑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무리가 육지로 황급히 도망쳐 산허리에 진을 쳤다. 관군 등이 철환과 편전을 빗발치듯 어지럽게 쏘아대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포로가 되었던 사천 여인 1명을 빼앗아 왔다. 칠천량에서 숙박을 하였다.
1593년 3월 7일(임술) 맑았다. 우수사(이억기) 영공과 이야기하였다. 막 어두워질 무렵 배를 출발하여 걸망포에 이르니 날이 이미 밝아왔다.
[원문] 七日壬戌 晴. 与右令公話. 初昏 發船到巨乙望浦 則日已曉矣.
1593년 3월 8일(계해) 맑았다. 한산도로 돌아왔다. 《후략》
위 기록 가운데 3월 7일 일기에 ‘거을망포(巨乙望浦)’라는 지명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을(乙)’은 보통 우리말의 리을(ㄹ) 받침으로 사용되곤 하였으므로 ‘巨乙望浦’는 ‘걸망포’로 읽힌다. 3월 6~8일 일기의 정황을 살펴보면 걸망포가 한산도 주둔지 부근 지명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걸망포가 나타나는 1593년 『난중일기』의 또 다른 기록으로서, 걸망포가 견내량 아래 한산도 부근에 있었음을 다시 파악할 수 있다.
1593년 5월 9일(임술) 흐렸다. 아침에 출발하여 걸망포에 이르니 바람이 순탄하지 못했다. 우수사(이억기), 가리포첨사(구사직)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원 수사(원균)가 2척의 전선을 이끌고 와서 모였다.
[원문] 初九日壬戌 陰. 朝發到巨乙望浦 風不順. 与右水相加里浦 共坐談論. 夕 元水使率二隻戰船來会.
1593년 7월 4일(병진) 맑았다. 흉악한 적들 수 만 여명이 늘어서서 [위세를] 과시하여 매우 통분하였다. 저녁에 진을 걸망포로 물리고 숙박을 하였다.
[원문] 四日丙辰 晴. 兇賊幾萬餘頭 列立揚示 痛憤痛憤. 夕 退陣于巨乙望浦宿.
1593년 7월 5일(정사) 맑았다. 새벽에 망군이 와서 “견내량을 적선 10여 척이 넘어왔다.”고 보고하기에 여러 배를 한꺼번에 출발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적선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중략》 저녁에 걸망포로 돌아와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원문] 五日丁巳 晴. 曉 望軍進告內 見乃梁賊船十餘隻踰來云 故諸船一時發向 到見乃梁 則賊船蒼遑退走. 《중략》 夕還到巨乙望浦 結陣經夜.
1593년 7월 11일(계해) 맑았다. 아침에 이상록이, 명령을 어기고 먼저 간 여러 장수에게 전령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적선 10여 척이 견내량으로부터 내려왔다.”라고 보고하였다.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5~6척이 벌써 진을 친 곳 앞까지 이르렀다. 그들을 쫓아가니 도로 달아나 (견내량을) 넘어갔다. 오후 4시경에 걸망포로 돌아와 물을 길었다. 《후략》
[원문] 十一日癸亥 晴. 朝 李詳祿 以違令先去諸將傳令事出去 還告曰 賊船十餘隻 自見乃梁下來云. 擧矴出海 則賊船五六隻已到結陣前. 追之則奔還還越. 申時 還到巨乙望浦 汲水. 《후략》
위 기록 가운데 1593년 7월 11일 일기는 ‘걸망포로 돌아와 물일 길었다.’라는 중요한 정보를 서술하였다. 조선시대는 현대와 달리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이 나는 수원지를 미리 알아둔 다음 그에 맞추어 이동을 계획하여야 했다. 많은 사람이 활동하는 군대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위 7월 11일 일기는 걸망포가 수원지가 있는 중요한 지역임을 의미하는 기록이다.
걸망포는 1596년 『난중일기』에 3차례 더 등장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1596년 1월 4일(신미) 맑았다. 밤 2시경에 초취를 하고 동이 틀 무렵 배를 출발하였다. 이여념(사량만호)이 와서 만났는데 진중의 일을 물으니 “모두 여전하다.”고 하였다. 오후 4시경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거망포에 이르니 경상수사(권준)이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후략》
[원문] 四日辛未 晴. 四更初吹 質明 開船. 李汝恬來見 問陣中事 則皆依前云. 申時 細雨霏洒. 到巨望浦 則慶尙水使領諸將出候. 《후략》
1596년 4월 13일(기유) 맑았다. 아침에 어사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 늦게 포구로 나가니 남풍이 많이 불어서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선인암에 이르러 종일 이야기하다가 저물 녘이 되어 작별하였다. 저물 녘에 거망포에 이르렀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원문] 十三日己酉 晴. 朝食 与御史同對. 晩出浦口 則南風大吹 不能行船. 到屳人岩 終日談話 乘暮相別. 暮到巨網浦 未知行過否也.
1596년 6월 17일(계축) 맑았다. 늦게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활 15순을 쏘고 헤어졌다. 우수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충청(충청우후 원유남)이 자기 아버지의 제사 때문에 거망포로 돌아갔다.
[원문] 十七日癸丑 晴. 晩 右水使來 射帿十五巡而罷. 水使不飮. 忠淸以其父忌 告歸巨網浦.
『난중일기』의 1596년 기록은 걸망포를 ‘巨望浦’ 또는 ‘巨網浦’로 표기하였다. 1593년 기록의 ‘巨乙望浦’와 표기가 다른 것이다. 우리말을 한자로 차자(借字)하여 표기하다 보니 1593년 표기와 1596년 표기에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행록」에는 걸망포의 지명이 ‘傑望浦’로 또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걸망포의 지명은 『난중일기』 이외에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구총수』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부·군·면 등의 인구 분포 상황을 수록해 놓은 책으로서 부·군·면 소속된 마을의 지명도 실려있다. 다음은 걸망포의 지명이 수록된 『호구총수』의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春元面) 기록이다.
조선시대의 고성현 춘원면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시내, 용남면, 산양읍, 황리와 노산리를 제외한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호구총수』에 수록된 걸망포는 ‘傑望浦里’로 표기되어 걸망포가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 ‘傑望浦里’는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행록」의 ‘傑望浦’와 표기된 한자가 거의 일치 한다.
『호구총수』의 춘원면 지명은 대부분 지리적으로 인접한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호구총수』의 걸망포 앞뒤 지명을 살펴보면 삼천진리, 달아리, 연대도리, 연명포리 등이 나타나는데, 이들 지명은 지금의 산양읍에 속한 마을 지명과 거의 일치한다. 즉, 걸망포는 지금의 산양읍에 위치한 지명임을 유추할 수 있다.
걸망포의 지명은 1948년에 편찬된 『산양면지』에 다시 나타난다. 비록 『산양면지』는 해방 이후 근대에 편찬된 자료이지만, 조선시대 읍지 양식과 비슷한 체제를 갖춘 순한문 자료로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산양면 지명을 거의 고스란히 수록하였다. 다음은 『산양면지』의 「포해(浦海)」조에 수록된 걸망포 지명이다.
위 『산양면지』는 ‘건망포(建望浦)’라는 지명을 수록하고, 이곳이 신봉동(新峰洞)에 해당하며 옛 지명으로 ‘傑望’이라고 서술하였다. 즉, 건망포=신봉동=걸망포라는 의미이다.
1959년에 작성된 『경상남도지명조사철』에도 ‘신봉’과 ‘걸망개’의 지명이 등장한다. 다음은 그 해당 자료이다.
위 『경상남도지명조사철』은 당시의 통영군 산양면 신전리 신봉(新峰)부락을 ‘걸망개’로도 부른다고 수록하였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산양면지』의 ‘건망포(建望浦)’관련 내용과 일치한다.
『산양면지』의 신봉동(新峰洞)과 『경상남도지명조사철』의 신봉(新峰)부락은 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신봉(新峰) 마을이며, 이곳에는 아직도 ‘걸망포’라는 구전 지명이 전한다.
필자는 일찍이 2000년도에 경남 통영시 산양읍 연곡리 오곡도 주민 유복관(2003년도에 작고) 어르신을 인터뷰하여 산양읍 신전리 신봉마을이 걸망개임을 채록하였다. 그분은 “신전리(新田里)는 ‘새밭’이라는 뜻이며 지역민들은 ‘새바지’라고 부른다. 신전리에 속하는 신봉마을은 예로부터 ‘걸망개’라고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후 통영에서 공인중개사를 하는 유이진 씨로부터 같은 내용을 채록한 바 있다. 신봉마을 삼거리 앞의 느티나무가 우거진 곳까지 예전에는 바다였으나, 지금은 걸망포 포구의 상당 부분이 매립된 상태다.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사료들과 현지인 인터뷰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이순신 장군이 수시로 거명했던 걸망포(巨乙望浦)는 경남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신봉마을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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