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 구례현감을 지낸 이원춘은 1597년 정유재란 시기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장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수정실록』의 기사(31권, 선조30년-1597년 9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에 따르면 남원성이 함락될 때 접반사 정기원, 전라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 남원부사 임현, 남원판관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등이 전사하였고 명나라의 장수인 총병 중군 이신방, 천총 장표, 천총 모승선도 함께 전사하였다.
이후 남원성에서 전사한 병사와 백성의 무덤인 만인의총(萬人義塚)이 만들어져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그 이름이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맑았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도 교서와 유서를 받들어 들어왔다. 유지는 바로 겸삼도통제사를 (제수하는) 명이었다. 숙배한 뒤에 삼가 잘 받았다는 서장을 쓰고 봉했다. 그날로 곧바로 두치를 경유하는 길을 떠났다. <<중략>> 석주에 이르니 이원춘(구례현감)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을 만났더니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하였다. 저물녘에 구례현에 이르니 온 지역이 고요하였다. <<후략>>
[원문] 晴. 早朝 宣傳官梁護 不意入來 賚敎諭書. 有旨則乃兼三道統制使之命. 肅拜後祗受書狀書封. 卽日發程 直由豆恥之路. <<중략>> 到石柱 則李元春与柳海守伏見之 多言討賊事. 暮到求礼縣 則一境寂然. <<후략>>
『난중일기』는 이원춘을 지칭할 때 대부분 그의 관직인 '구례현감' 또는 '고을 원'으로 기록하였다. 『난중일기』가 이원춘을 그의 이름으로 직접 지칭한 것은 위 1597년 8월 3일 일기가 유일하다. 흥미롭게도 위 일기는 이순신이 통제사를 다시 제수받은 사실을 기록한 바로 그 일기이다.
위 일기에 언급된 '석주'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있는 사적 제385호 구례 석주관성(石柱關城)을 말한다. 석주관은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을 잇는 관문이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려 말에 왜구의 방어를 위해 진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에는 전라도방어사 곽영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석주관을 방어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다음 남원성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난중일기』에 보이는 이원춘의 이름과 행적은 이를 입증하는 기록이다.
이원춘의 신상과 행적을 기록한 가장 자세한 자료는 『충효사구현실기(忠孝祠九賢實紀)』에 수록된 「통훈대부행구례현감증통정대부병조참의이공사실(通訓大夫行求禮縣監贈通政大夫兵曹參議李公事實)」일 것이다. 이 자료는 그 영인본이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되어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원춘의 「사실(事實)」에 따르면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 생년은 갑인년(1554년), 거주지는 교동(喬棟),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현근(李玄根)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83년 온성부사 신립의 휘하에서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이 교동과 강화를 공격하자 황대충(黃大忠) 등 10여 인과 함께 적의 공격을 차단했으며, 이후 체찰사 정철의 막하에 있다가 구례현감으로 부임했다고 한다.
이원춘의 「사실」은 그의 신상과 행적을 꽤 자세히 기록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사실」이 수록된 『충효사구현실기』가 후대인 1867년경 여러 자료를 망라하여 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실」에 담긴 내용의 신빙성을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행히 최근 발굴된 자료 등을 통해 그의 「사실」에 담긴 내용을 일부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 자료는 이원춘의 과거급제 기록이 담긴 『계미문무과방(癸未文武科榜)』이다. 이 방목은 2023년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등록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원춘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언화(彦和), 생년은 을묘년(1555년), 거주지는 교동(喬棟),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부사직(忠佐衛副司直) 이현근(李玄根)이다. 「방목」과 「사실」에 기록된 이원춘의 신상을 비교해보면, 생년이 한해 다르게 기록된 점 이외에는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둘째 자료는 황대충의 과거급제 기록이 담긴 『신묘별시문무과방목(辛卯別試文武科榜目)』이다. 이 방목도 2010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등록되었다. 이에 따르면 황대충의 생년은 계해년(1563년), 거주지는 교동(喬棟)이다. 황대충의 거주지가 교동으로 기록된 점은, 황대충이 이원춘과 함께 교동과 강화를 지켰다고 서술한 이원춘의 「사실」 기록과 부합한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의 1592년 10월 18일은 정철이 구례현감 이원춘 등을 영장(領將)으로 삼아 개령과 성주의 전투를 돕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이원춘이 정철의 막하에 있었다고 서술한 이원춘의 「사실」 기록과 일치한다. 『선조실록』의 기사(31권, 선조25년-1592년 10월 13일 기해 1번째 기사)에 따르면 당시 체찰사 정철이 강화도를 들렀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원춘은 아마도 이즈음 정철에 의해 기용된 것으로 보인다.
『효종실록』의 기사(7권, 효종2년-1651년 9월 20일 갑오 3번째 기사)에 따르면 이원춘은 본래 미관(微官)이고 또한 자손도 없어서 이 시기(1651년)까지 포증(褒贈: 상을 내리고 벼슬을 추증함)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단순한 추정이지만 그의 집안이 하급 양반 또는 양민 계층이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원춘의 「사실」이 그의 본관을 경주로 기록하고 있지만, 경주이씨 족보에서 그의 계보를 찾기가 어려운 점도 같은 이유일 수 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구례군, 『구례 석주관 칠의사』, 1990, 구례군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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