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살다 보면 ‘죽다 살아났다’라고 느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겨우 살아서 그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그때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다면 난 이 세상에 없었을 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3)>는 폭풍에 침몰하는 난파선에서, 작은 배를 가지고 겨우 혼자 살아남아 바다를 표류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소년, 파이의 이야기다.
배가 침몰하기 전,
파이는 인도의 동물원을 운영하며 종교보단 합리적 이성의 힘을 믿는 아버지와, 종교와 영성의 힘을 더 신뢰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조금은 특이한 아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한 가지 종교 활동을 하느라 바쁜데, 파이는 이에 물음을 가지고 여러 명의 신을 ‘소개받아’ 여러 가지 종교활동을 한꺼번에 하느라 바쁜 아이였기 때문이다. 직접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에 호기심과 희망을 품은 아이.
열정이 넘치던 파이는 자신의 동물원 사육시설에 숨어들어, ‘리차드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와 영혼의 교류를 시도하다 ‘짐승에게 잡이먹힐 뻔 했다’며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난다. 이날 아버지가 본보기로 보여준 호랑이의 산짐승 사냥을 본 뒤로는 충격을 받아, 영혼과 영성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을 뒤로하고 평범한 학생으로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파이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더 나은 교육과 미래를 위해 가족을 북미로 이사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파이네 집안은 동물원의 동물들을 화물선에 모두 태우고 북미로 향한다.
그렇게 배는 침몰.
폭풍 속에 기절한 채 작은 배 위에서 겨우 깨어난 파이의 눈앞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하기만 한 망망대해만이 펼쳐진다. 그리고 화물선에서 뛰쳐나온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그를 잡아먹으려는 하이에나, 그리고 오랑우탄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
곧이어 다친 얼룩말은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되어 죽고, 오랑우탄도 하이에나와 싸우다 죽는다. 그리고 갑자기 작은 배 천막에서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뛰쳐나와 하이에나를 물려 죽인다.
바다에서 꼼짝없이 호랑이와 살아남아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파이. 어린 시절 영혼의 교류는 물론이거니와 산짐승을 잡아먹던 그 호랑이가 무섭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배에 있던 비상식량과 생존 가이드, 그리고 호랑이를 길들임으로써 구조를 기다리다 끝내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는다.
바다를 표류하면서 만나는 날치떼와 빛나는 해파리들의 향연, 그리고 다시 만난 폭풍우와 그로 인해 우연히 정박한 작은 섬의 비밀 등은 파이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을 목도하며 신의 존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들에 연속이었다. 또한 자신과 달리 철저히 본능대로 행동하는 호랑이와 영혼이 맞닿는 순간 깨닫는다. 이는 아버지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마침내 구조된 파이는 엉엉 울며 생각한다. 리차드 파커가 없었다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영화 마지막쯤에선, 감독은 파이의 이 기이한 생존 경험이 실재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도록 관객들을 유도한다. 영화 속 파이의 말을 빌리자면, ‘내 생존 경험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고 증명할 수도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믿을 것이냐.’라며.
영화는 단순히 파이와 호랑이의 장대한 영상미의 조난 영화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이의 아버지가 가진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파이의 어머니와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가르쳐준 내 안의 본능을 다루는 힘과 초월적 존재 앞에서 겪어야 할 겸허한 믿음, 나아가 미래를 믿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 이런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연구한 기록들에 따르면, 생존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물로 갈증을 해결하기보단, 얼굴을 닦으며 자신의 존엄을 지킨 사람들이 살아남는다고 한다. 즉 희망을 잃지 않은 자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파이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호랑이와 함께 살아남으며 끝내 영혼의 교류와 우정을 느끼는 장면은 인간이 문명에서 학습하며 믿어온 것과 달리 자연 본연의 모습일 때, 직면한 자신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는 가족도 잃고 모두 잃은 파이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다른 대륙에 정착해 살게 한 원동력이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파이를 살아남게 한 것은 비상식량도, 생존 가이드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경험과 그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힘. 포기하지 않고 꿈꾸는 희망이 결국 스스로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살다 보면 ‘죽다 살아났다’라고 느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옳은 답은 미리 정해진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을 정답으로 만드는 강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Life.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임이로]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