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우린 같은 하나다

이태상

‘소원이 말(馬)이라면 거지도 탈 텐데’란 서양 속담이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말로는 꿈 밖이라느니, 꿈에도 없었다느니, 꿈꾼 셈이라 한다. 이 말대로 그 누가 백마가 아닌 흑마를 타고 세계의 모든 약소국 약소민족의 인권 챔피언으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사가 된다면 오죽 좋으랴.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트레이스 태생의 검투사 출신 스파르타쿠스(111 BC-71 BC), 멕시코의 농지 개혁가 에밀리아노 사바타(1879-1919),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그리고 1960년대에 흑백 인종의 통합이 아닌 분리주의를 주창하며 흑인의 자존자립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자기방어 자위책으로 정당방위의 폭력도 불사하자고 흑인의 자존자긍심을 고무, 선양한 흑인 인권 투사 ‘말콤X’(1925-1965) 같이 말이다. 

 

그가 할 일은 무엇보다 먼저 지배계급이 독선 독단적으로 저희들만을 위해 설정해 놓고, 강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집행하고 있는 갖가지 부당한 법률과 규칙과 관습에 도전하는 일일 것이다. 법이나 상식보다 힘, 수단보다 목적, 진실보다 거짓, 다수보다 소수, 빈자보다 부자, 약자보다 강자, 여자보다 남자, 자유주의나 진보주의보다 보수주의나 복고주의를 옹호하는 법규와 관습에. 그래서 그동안 소수 특권층만이 즐기던 살만한 삶을 우리 모두 다 같이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다시 말해 그 누가 성공했을 경우, 세상이 뒤집혔다고 열광한 나머지 복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늘님 아버지” 하는 대신 “땅속에 계신 우리 땅님 어머니” 부르면서 남성 백인 지배체제에서 여성 유색인종 지배체제로 바뀌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조심하고 피해야 할 함정이 흑백논리다. 마치 세상 한쪽에는 악인만 있고, 또 한쪽에는 선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형편과 상황에 따라 모든 비백색 유색인종, 비선민인 이방인, 비기독교인인 모든 미신자 이교도, 그러다가는 너와 나,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오로지 나 혼자만 옳다는 유아독선 유아독존이 되고 말테니까. 이와 같은 유아독선과 유아독존적 가치관이 유사 이래 인류 역사를 통해 온갖 잔악무도하고 파렴치한 천하만행을 여호와 하나님, 기독교, 민주주의, 자유세계 또는 공산주의, 노동자, 농민, 아니면 그 어떤 왕실과 귀족 양반이나, 그 어떤 제국 제왕 천황폐하, 위대한 그 누구 그 무엇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미화시켜 오지 않았는가. 십자군을 비롯해 사람사냥 아니면 황금 사냥에 나선 서양의 해적들이 반항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 거의 다 멸종시키고, 복종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노예로 삼아 백인들의 식민지와 제국을 건설해 왔다.

 

이와 같은 가치관이 최근엔 한국의 분단, 캄보디아의 초토화, 니카라과의 붕괴 작전, 포클랜드 섬, 그라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한국전과 월남전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 미화시켜 왔다. 한편 이렇게 전횡적인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고 반대하는 ‘반항의 정신’을 가진 이상(理想) 아니 이상(異想)주의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역적, 반도, 반동분자, 이단자, 광인, 악인, 죄인, 깜둥이, 빨갱이, 노랭이로 몰려 박해받고 희생된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폭군을 몰아내기 전에 우리 각자 가슴과 머리속에 있는 폭군부터 몰아내야 하리라. 이를 앞서 깨닫고 우리보다 먼저 이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 떠난 선각자 코스미안 칼릴 지브란(1883-1931)이 남긴 그의 우화집 방랑자(1932)에 나오는 비유담 하나 우리 함께 음미해 보자.

 

눈물과 웃음

 

땅거미 질 때 이집트 나일강에서 하이에나와 악어가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요즘 어떻습니까, 악어 씨?”

“좋지 아니하오이다. 때때로 고통과 슬픔에 복받쳐 내가 울기라도 하면 남들이 저건 악어가 거짓으로 흘리는 위선의 눈물일 뿐이라고 하니 내 기분이 여간 상하는 게 아니라오”

“그대는 그대의 고통과 슬픔을 말하지만 잠시 내 말도 좀 들어 보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경이로운 기적에 감탄, 기쁨에 넘쳐 온 자연과 함께 내가 소리 내어 웃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저건 실컷 배부르게 먹이 많이 잡아먹고 좋아서 웃는 하이에나의 잔악한 웃음소리일 뿐이라고 한다오”

 

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한 사람의 웃음은 때론 다른 사람의 눈물이고, 또 한 사람의 눈물은 또 다른 사람의 웃음이다. 비근한 예로 우산 장사와 양산 장사가 그렇고, 의사와 환자, 유가족과 장의사가 그렇지 않은가. 부처님 앞에 공양드리거나 어떤 귀신한테 굿이라도 해서 대학입시, 사법시험 등 어떤 시험에 운 좋게 합격한 자식 부모의 웃음꽃은 낙방거자 부모의 울상 아닌가. 

 

부처님이나 예수님 또는 어떤 귀신이 사람에게 길흉화복을 정말 주는지 또 참으로 신(神)이 정말 존재하는지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 수 없겠지만, 설령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신이 신다운 신이라면 약육강식의 자연계와 인간세계에서 무조건 강자의 편을 들거나 어떤 특정 인종이나 개개인의 이기적인 기도나 기구를 편파적으로 들어주는 그런 신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즐겁고 기쁜 일이 있을 때 이것이 다 내가 잘나고 예뻐서 하느님이 내게만 내리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나만큼 축복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느끼는 미안지심에서 악어같이 거짓으로라도 눈물 좀 흘리는 편이 더 좀 양심적이 아닐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불행에 같이 울고 가슴 아파하기 전에 당장 잠시 나타난 그야말로 뜬구름같이 덧없는 내 행복부터 먼저 만끽하면서 하이에나처럼 웃어보는 편이 더 좀 인간적이고 솔직하며 정직하지 않을까.

 

아, 이렇게 세상에는 악어탈을 쓴 심약(心弱 )한 토끼나 늑대탈을 쓴 천진난만한 병아리가 있을 수 있으리라.

 

“행복이란 문제가 없는 게 아니고 어떤 문제든 대처 해결하는 능력이다.”

-작자 미상

 

“네 삶을 사는 두 가지 방식과 태도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니체는 우리 모두 나그네가 되라고 한다. 그것도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객이 아닌 나그네 말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최종 목적지란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또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을 위한 높고 고상한 목표를 세워라. 그리고 그 목표를 추구하다 죽거라.”

 

이 말은 성취할 수 있는 이상은 이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니체가 이상주의자라면 에픽테토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노예 출신으로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내가 죽어야 한다면 당장 죽겠다. 그러나 좀 있다가 죽으라면, 난 점심부터 먹을 것이다. 점심때가 되었으니까. 죽는 일은 그다음이니까.”

 

영화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이 1811년에 쓴 소설 ‘이성과 감성’을 각색해 만든 미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명품에서 쪽박 인생으로’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베벌리 힐스의 부유한 가정에 살던 노라와 메리 자매가 갑작스러운 부친의 사망으로 빈촌에 사는 외숙모 집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묻자 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시겠지만, 나는 바퀴벌레처럼 어디서든 잘 살 수 있어요.”

 

아! 이처럼 큰 그림에서 보자면 매사는 사소한 일이다. 그리고 양면이 있으며, 모든 것이 경이롭고 아름다울 뿐이다. 이상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현실주의자가 될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사항이겠지만, 동시에 둘이 다 됨으로써 낙천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낙천주의자가 다름 아닌 코스미안이리라.

 

“말하면 없어진다” 

 

미국의 삽화작가 에드워드 고리1925-2000)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이는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성과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문인이고, 그림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화가라면, 소리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음악가다. 그러면 삶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 그것도 사랑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뭐라 해야 할까? 

 

니체는 우리 모두에게 “너 자신이 되라”고 했다. 이는 ‘초인’이 되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초인’은 어떤 사람일까?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어 인간은 ‘인생세간 곧 사람이 사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는 천계와 하계 사이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이라는 말속에는 우리가 지상에 머물다 몸은 헌 옷을 벗어 버리듯 땅속에 묻거나 화장해 태워버리더라도, 우리의 심혼은 하늘로 비상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은가.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 ‘코스미안(Cosmian)’이 되라는 말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4.09.28 10:00 수정 2024.09.2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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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