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가족,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가을볕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편안한 숲길을 걷는 것이 최고다. 가을이 오는 첫째 징조는 숲이 헐거워진다는 것이다. 여름내 숲을 가렸던 무거운 덮개가 열리면서 빛이 서서히 숲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빛도 열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다. 그래서 가을 숲에 가면 마음을 내려놓은 자연의 하심(下心)을 만날 수 있다.
제주에서 올레길을 빼고는 걷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 한낮은 뙤약볕의 열기가 만만찮다. 제주에는 숲이 많다. 그중 한라수목원은 제주 시내와 가까워서 접근성이 뛰어나다. 연동 광이오름 기슭에 있는 5만 평에 달하는 삼림욕장에는 제주의 자생 수종과 아열대 식물 등 1,100여 종의 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특히 거의 오름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1.7㎞의 산책코스가 만들어져 있어 아침 일찍부터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수목원 대나무 숲에 들어가면 사각사각 댓잎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간지른다.

함덕과 가까운 중산간 지역에는 좋은 숲들이 모여 있다. 절물자연휴양림, 한라생태숲, 교래자연휴양림, 사려니숲길, 삼다수옛길 그리고 동백동산 산책로까지 모두 근처에 있다. 숲길을 걷다가 지루하면 함덕 해변으로 나가 바다를 보거나 서우봉에 오르면 된다.

제주의 대표적 걷는 길 중 하나로 꼽히는 사려니숲길은 제주시 비자림로의 입구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총 길이는 약 15km이며 숲길 전체의 평균 고도는 550m이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우거진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어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좋다. 삼나무로 가득한 울창한 숲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한껏 내뿜어 지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사려니숲에는 빽빽한 삼나무 외에도 졸참나무, 편백나무, 때죽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동거하면서 이들이 내는 초록빛 풍경은 디지털 기기에 혹사당하는 우리 눈을 편안하게 해준다.
길을 걷다 다리가 뻐근해지면 잠시 초록빛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눕거나,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 잠시 앉아 삼림욕을 즐기며 숲 사이로 부는 상쾌한 바람을 느껴보는 것도 사려니숲길을 즐기는 방법이다. 숲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보다 숲속에 있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걷는 것이 더 운치 있다.

가을 정원을 예쁘게 꾸며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카멜리아 힐을 찾는다. 동양에서 가장 큰 동백 수목원인 이곳은 6만여 평 부지에 가을부터 봄까지 시기를 달리해서 피는 80개국의 동백나무 500여 품종 6,0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가을 정원에는 오름에 가야 볼 수 있는 억새와 화려한 핑크뮬리와 소박한 루비뮬리,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온실에 만개한 가을의 전령 국화들 사이에 난 아기자기한 꽃길을 걷는 것도 또 하나의 볼거리이고 카페 야외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국화차 한잔은 이 가을날에 만나는 쉼표다.

구좌읍에 있는 '천년의 숲'으로 불리는 비자림(榧子林) 역시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숲이다. 사시사철 푸른 모습을 유지하는 비자림은 탐방로 주변에 수령 500∼800년의 비자나무 2천 800여 그루가 들어서 고요함과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천연기념물 제 37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비자림은 나무 높이는 7∼14m, 직경은 50∼110㎝에 이르는 거목들이 군집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비자나무 숲이다. 예부터 비자나무 열매인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여졌고,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데 사용되어 왔다.

숲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 사이로 나무와 덩굴이 서로 엉켜 자라며 치열한 햇빛 경쟁을 하고 있다. 탐방로에는 제주의 화산석 부스러기인 송이가 깔려있다. 천연 세라믹이 깔린 건강한 길이라서 맨발로 숲길을 걸으면서 울창한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비자림은 나도풍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난과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하다. 녹음이 짙은 울창한 비자나무 숲속의 삼림욕은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정신적, 신체적 피로 회복과 인체의 리듬을 되찾는 자연 건강 휴양효과가 있다.

숲속은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데다가 온통 풀과 나무와 덩굴로 덮여 있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자세히 보아야 돌로 쌓은 담장이나 숯가마터 같은 것들이 겨우 보인다. 한때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이지만 이제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의 복원력은 느리지만 위대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숲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나무들의 모습도 압권이다. 비자림 주변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기생화산인 월랑봉,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등이 있어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벼운 등산이나 운동을 하는데 안성맞춤인 코스이다.

가을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리다. 그래서 가을바람이 불어대면 숲의 나뭇잎은 기다렸다는 듯 하늘로 날아오른다. 바람이 몰아치는 숲에서 낙엽들이 그려내는 군무는 참으로 서럽다. 그러나 숲의 아래쪽은 일 년 중 가장 짭짤하다. 울창한 숲을 키워냈던 숲의 바닥이 두툼한 보너스를 받기 때문이다. 식물들은 가진 것을 털어내고 동물들은 열매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분주하다. 먹이가 풍부하니 둘 사이에 행복한 동거도 가능하다. 곳간에 인심 난다고 많은 동물이 공존의 평온함을 느긋하게 즐기는 시기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있다는 것은 준비할 시간을 가지라는 자연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깊어가는 가을날, 자연이 던지는 메시지를 만나고 싶으면 제주 숲을 찾을 일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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