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자연이 그린 秋상화, 장성 백양사

여계봉 선임기자

 

누구라도 꽃을 보면 닫혔던 마음이 꽃잎처럼 절로 열린다. 꽃 이름을 모르면 어떠리. 태초에 무슨 이름이 있었더냐. 이름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의 그림자일 뿐. 작은 꽃을 보고도 연애 감정처럼 가슴 뛰는 가을날을 만나고 싶다. 가을날 꽃은 역시 단풍, 비 갠 뒤 더 붉어진 단풍을 구경하러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를 향해 길을 떠난다. 

 

버스에서 내려 산사로 들어가는 일주문 가는 길은 맑은 계곡물과 선홍빛 단풍이 어우러지는 정취가 그만이다. 고개를 들면 백암산의 백학봉과 유려한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멀리 보이는 절집은 화려한 단풍놀이와는 상관없이 고즈넉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햇빛 좋은 이런 날 단풍 그늘 길을 걷는 것만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절집으로 들어서는 일주문은 색계와 무색계의 경계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청정도량에 들어서는 순간 저잣거리에서 묻혀온 홍진(紅塵)은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일주문에서 쌍계루까지 1.5km 산책로는 '한국 8경'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하나다. 

 

백암산 일주문에서 쌍계루 가는 길은 '한국 8경'의 하나다.

 

사시사철 철 따라 변하는 백암산 산색은 금강산을 축소해 놓았다 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 중의 으뜸은 단풍이다. 산 전체와 조화를 이루면서 서서히 장작불처럼 타오르며 산을 물들이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산사 초입부터 조계종 18교구 본산인 백양사까지 이어지는 약 30분 거리 구간의 도로 양옆과 백양사 주위에는 단풍이 터널을 이룬다. 특히 인공미가 가미되지 않은 이곳의 자생 단풍은 일명 ‘애기단풍’으로 불릴 정도로 작지만 색깔이 진하다.

 

백암사 또는 정토사로 불리었던 대사찰 백양사(白羊寺)는 내장산 가인봉과 백학봉 사이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무왕 3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숙종에 이르러 백양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전설에 따르면 숙종 때 환양선사라는 고승이 백양사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백양 한 마리가 설법을 듣고는 본래 자신은 하늘의 신선이었는데 죄를 짓고 쫓겨 왔다면서 죄를 뉘우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하여 이름을 백양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책로에서 올려다본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한 백학봉은 계절에 따라 그 색깔이 변한다. 백암산에서 뻗어 내린 백학봉은 거대한 바위봉으로, 마치 그 형태가 '백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백학봉(白鶴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육당 최남선은 ‘백학봉은 흰 맛, 날카로운 맛, 맑은 맛, 신령스러운 맛이 있다.’라고 극찬했다. 

 

호수에 비친 백암산의 하얀 거암 백학봉

 

전남 장성의 백암산(741m)은 내장산(763m), 입암산(626m)과 함께 내장산 국립공원을 이루고 있으며, 백암산은 상왕봉을 최고봉으로 내장산, 입암산 줄기와 맞닿아 있다. 백암산 정상인 상왕봉에 서면 몽계계곡과 북서쪽으로 방장산과 입암산, 북동으로는 내장산, 남동으로는 운무에 쌓인 무등산이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낸다. 

 

백학봉 아래 쌍계루(雙溪樓)는 단풍의 백미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백학봉과 쌍계루 누각, 그리고 선홍빛 단풍이 데칼코마니처럼 연못 속에 그대로 비치는 장면은 우리 땅에서 단풍이 빚어내는 최고의 풍광이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에 둘러싸인 쌍계루의 단아한 자태와, 백암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백학봉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그야말로 수류(水流) 화개(花開)다.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백학봉과 고색창연한 누각이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연못에 반영을 드리우고, 애기단풍 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이 모든 것들이 가을이라는 자연이 그려낸 한 폭의 추상화(秋像畵)다.

 

가을이 그려낸 한 폭의 추상화(秋像畵), 백양사 쌍계루

 

아함경(阿含經)에는 산 정상을 올라가 보라는 부처님 가르침이 들어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는 법, 산 아래처럼 좁은 소견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절집 뒤 백학봉에 오르면 백양사와 부근 계곡의 단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위 끝에서 서서 아래를 보면 천애절벽으로 오금부터 저려온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오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 단풍의 파도에 아찔해진다. 옥녀봉에 올라 백양사를 내려다보면 암자가 마치 붉은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 같다. 몸은 사바세계에 머물고,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문다. 울울창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백양사와 팔레트에 섞어놓은 붉고 노란색 물감처럼 단풍이 번져가는 절집 주변 산자락이 황홀 그 자체다.

 

옥녀봉에서 바라본 백양사는 연꽃 속의 보석이다.

 

산에서 내려와 절집으로 들어서니 뜨락의 돌부처님이 고요와 평안과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속인을 반긴다. 자연과 조물주의 걸작을 연출하는 백양사를 거닐다 보면 질리도록 함께하던 마음속의 번뇌도 그대로 녹아 버리는 듯하다. 무의식중에 내딛는 그 발걸음이 염불되어 이미 속세의 모든 근심과 몸에 밴 자만과 오만 따위는 저절로 씻겨 내릴 터이니. 산사 초입에서 단풍내음 싣고 산 위로 올라오던 골바람은 백양사에 잠시 들러 속인(俗人) 이마의 땀방울을 씻어준다. 그리고 가을의 향기까지 담아서 골짜기를 타고 백학봉을 오른다.

 

절집 아래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도량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단풍놀이로 흥에 겨워 들뜬 마음도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고 잔잔해진다. 

 

옴마니반메흠

연꽃 속의 보석이여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4.11.05 09:50 수정 2024.11.0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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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