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미 칼럼] 호모 픽투스의 비애

지영미

[제6회 코스미안상 은상] 당선 소감

 

감나무가 봉긋이 열매를 달기 시작할 때 썼던 글이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감나무도 주황빛이 선연한 감을 달았습니다. 글쓰기는 보이지 않는 이정표를 찾아가는 길이지만, 혼자만의 방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는 일입니다. 아이들과 호흡하면서 마음에서 무시로 안타까움이 일었습니다. 

 

치유의 수단인 글이 바깥의 소리를 쓰는 데 사용되었으면 싶었습니다. 기술 문명이 우리의 근간을 흔든다고 해서 사람이 가진 본연의 감수성마저 지배할 수는 없으리라 자위해봅니다. 돌 하나의 파문이 강으로 퍼져 나가듯, 문학이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가진 힘을 알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코스미안 공모전에 응모하면서 막연하기만 했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의 글을 당선작으로 택해 주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호모 픽투스의 비애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기술이다. 고유한 능력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확장하고 상상을 첨가한다. 그러한 과정은 자연 상태로 있던 사람과 사물들, 작고 무의미한 사건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유기적으로 얽힌 이야기는 그 시대의 정서와 현실에 맞게 가감된다. 인간은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대에 걸쳐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전승한다.

 

이야기는 민화, 만담 설화라는 옷을 입고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와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애착 인형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세월 속에서 전하는 사람의 순발력으로 달라지기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양념을 첨가하면서 변형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뭉근히 숙성시킨 고유한 영양소가 이야기 속에 가라앉아 있다. 우리는 응집된 양분을 곱씹으면서 지혜를 배우고 막다른 길에서 방법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 속에 과학이 주는 힘, 그 이상의 동력을 발휘한다.

 

이야기하기와 귀 기울여 듣기는 상호의존적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는 보편적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 겨울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들었던 도깨비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었다. 몰아의 상태로 들어간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곱씹으면서 단물이 나오는 경험을 누렸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늘 그렇듯 권선징악으로 끝났다. 나쁜 사람은 꼭 벌을 받았으니, 우리는 저녁마다 사람이 살아 나가는 데 필요한 도덕적 소양을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부지불식간에 스며든 이야기는 마음 깊은 곳에 깃들어 삶을 좌우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핵가족화 시대에 이야기를 해주던 할아버지 할머니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어주는 손자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눈과 귀가 뜨이는 순간부터 전자기기를 손에 들고 활극처럼 펼쳐지는 동영상의 세계에 길든다. 게임이 아이들의 주요 오락 수단이 되면서 가족 간의 대화는 줄어들었다. 혼란스러운 화면과 자극적인 소리를 접하면서 둔감해진 감각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와 높은 주파수에만 집중한다. 뜸 들이듯 소복소복 쌓아가는 이야기는 더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대신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법칙이 아이들에게 투사된다. 

 

꿈과 감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인 이야기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글보다는 사진을 사진보다는 영상을 좋아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짧은 글을 선호한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목적성을 가진 대화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만 집중하는 단발적인 글과 영상은 메마른 가상의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자신의 목적에 맞는 언어만 섭취하려는 독자의 경향은 말로 하기보다는 문자를, 대면보다는 비대면으로 소통하길 원한다. 얼굴 없는 대화는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렵고 쉽게 오해와 불신으로 빠진다. 

 

서사의 구조에서 화자와 청자는 정신적으로 여유롭고 넉넉하다. 주인공이 성장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절정의 순간까지 시간이 흘러야 한다. 마치 새가 알을 품고 부화할 때까지 시간을 단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는 발단과 전개를 거쳐 절정에 이를 때까지 뇌 속의 경험 중추를 활성화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한 아이는 느긋하다. 이야기가 상호교환 되는 사이 스스로 사건의 얼개를 만들고 허무는 사이 결말에 이른다. 

 

도구가 인간 생존의 물리적 수단을 제공했다면 서사는 정신적 영역을 담당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화자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체화하는 과정에서 집중력과 상상력을 키운 아이들은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전자기기에 종속됐던 아이들은 느린 서사에 쉽게 나른 해하거나 지루해한다. 부모나 교사는 쉼 없이 게임 속 캐릭터들처럼 자극을 주어야 집중을 끌어모은다. 세세하게 분석하고 이차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은 아이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로 여겨진다. 흥미 위주의 빠른 결말을 끌어내는 이야기만 살아남는다. 

 

포노 사피엔스는 지난 200년간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신인류다. 손가락 하나로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기억의 저장고에서 서성거릴 필요가 없다. 욕망에서 충족까지 수초의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다. 무궁무진한 콘텐츠의 바다는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내어 해결하고 조절하는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다. 순간적으로 화면이 바뀌고 다른 사람의 에피소드로 옮겨가는 과정은 인식, 사고, 확장하고 저장하는 절차를 무용하게 만든다. 긴 호흡의 이야기가 무시된 가상의 공간은 사실과 진실을 가려내는 능력마저 앗아가고 있다.

 

시공간을 이어오면서 가감된 구비전승의 문학은 더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뉴스만이 대중의 발길을 붙잡는다. 기사는 점점 흥미 위주의 가벼운 가십거리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도구로 전락했다. 거기에 진실과 사실의 구분은 모호하기만 하다. 길게 머무르는 시선과 이어서 오는 가슴 훈훈해지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더는 독자들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연속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에 예속되어 살아간다. 우리는 셀까나 스냅사진으로 자신을 대변하며 찰나의 이야기를 올리는 소셜 네트워크 세상에 광분 되어있다. 오감을 자극하는 내용에 끊임없이 공감 버튼을 누른다. 디지털이 열어놓은 세상에서는 연달아 정보가 올라오고 새로운 정보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단발적이고 자극적인 메시지를 드러낼수록 점점 텅 비어가는 자신을 경험한다. 과거가 현재의 자산이 되고 미래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인 나만의 이야기, 내 생각과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적인 이야깃거리에서 충격받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소외감을 느낀다. 

 

뿌리가 담긴 이야기가 사라진 세상은 머리만 비대해진, 알맹이 없는 인간을 양산한다. 꿈도 자신만의 철학도 상실한 인간은 장면만 바뀌는 가상의 공간 속 캐릭터를 닮아간다. 어제를 돌아보지 않는 삶, 현존재로만 살아가는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호모 픽투스 (Homo fictus, 이야기하는 인간)은 점점 정신적 공간을 줄여 가고 있다. 

 

서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디지털 세상에서는 절대 구현해 낼 수 없다. 서사는 단순히 설명하는 디지털 세상과는 차별화된다. 이야기는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 낼 수 있다. 구시대의 유물처럼 먼지 덮인 창고에서 죽어있는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다가 언제든지 기회가 닿으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부활만이 우리를 다시 꿈꾸는 인간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작성 2024.11.05 10:15 수정 2024.11.0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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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