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돌 덩거리 농장

김태식

몇 년 전 친구가 울산 덕하리에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 찾았을 때 상상했던 작은 텃밭은 없었고 농장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제법 큰 규모였다.

 

이 농장은 외손녀의 예쁜 이름을 따서 ‘라온다온농장’이라 부른다. 하지만 고등학교 동기들은 ‘돌 덩거리 농장’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농장 주인인 이 친구가 고교시절 운동도 잘했고 체력이 워낙 강해서 붙여진 별명이 ‘돌 덩거리’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불리고 있는 정겨운 별명이다.

 

이 농장은 일상에 지친 여러 동기들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대양을 누비던 동기가 귀국을 하면 잠시 머물러 가는 필수코스이기도하다. 울산에 볼 일이 있어 온 친구들도 하룻밤 묵어가는 곳이 되기도 한다. 찾아오는 지인이면 누구나 먹여 주고 재워주는 곳이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부지런한 이 친구는 자신의 사업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방을 만들고 천막을 세우고 샤워장을 만들어 주거 형태를 가꾸었다. 도심에서 버리는 자원일지라도 이 친구의 손에 들어오면 중요한 생활 부품이 된다. 

 

농장에 겨울 추위가 머물러 있어도 그리웠던 봄이 되면 배꽃이 피고 감꽃이 화사하게 얼굴을 내민다. 그 옆으로 앵두나무, 자두나무도 자신을 알리는 꽃망울을 품고 있다. 매실나무, 사과나무, 보리수, 블루베리, 딸기 등이 열매를 맺어 주니 계절에 맞춰 입맛을 보게 한다. 두릅과 엉개 잎이 입안으로 들어가면 향기는 더욱 깊어진다. 심술부리는 바람이 불어도 꽃잎은 유연한 몸놀림으로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봄볕 따스한 날에 막걸리 몇 병과 소주 몇 병을 곁들여 삼겹살을 구우면 파티가 된다. 텃밭에서 당귀, 상추, 깻잎 이것저것 푸성귀를 밥상에 올리면 풍성해지니 채소 가게에 갈 필요가 없다. 익어가는 고기에 맞춰 소주가 목젖을 타고 내려가면 환상적인 자리가 된다. 주저리주저리 옛 얘기를 꺼내면 저녁이 한밤중이 되고 새벽이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며 하얗게 익은 봄 햇살이 이불을 갠다. 

 

이 농장에도 봄은 주인의 손길을 바쁘게 한다. 하룻밤을 지낸 친구들이 일을 돕는다고는 하지만 서툰 손놀림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기들의 서투른 봄맞이 품앗이는 농장을 활기차고 윤기 흐르게 한다. 

 

초 여름밤 울타리에 피어난 줄장미향은 코끝을 진동한다. 장미꽃을 눈빛에 묻으면서 지인들과 한 캔의 맥주를 넘기면 그 향기는 멀리 퍼져 간다. 그야말로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폭염이 쏟아져도 북쪽으로 병풍처럼 들러싸인 나지막한 산자락 덕분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친구가 손수 만든 원두막이 시원한 맥주 몇 병을 품으면 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한여름 피서가 되기도 한다. 원두막에서 수박을 입가심으로 먹으며 농장을 내려다보면 천하가 내 것인 양 부러울 것 없다는 친구의 말에 무릎을 친다. 

 

낙역재기중의樂亦在其中矣 “모든 즐거움 또한 이 가운데에 있다.”라는 공자의 말이 생각난다. 가을이면 이곳에도 갈색 바람이 초대장을 보내온다. 배가 연노랑색으로 익어가고 대봉감이 붉어져 가지를 늘어뜨리면 농장 주인의 손길은 바빠진다. 나는 무덥던 한 여름에 퇴비 한 줌 주는 일을 도와준 적 없고, 가지치기하는 봄날에도 품앗이 한 번이라도 해 준 적 없었다. 그래도 인심 좋은 농장주인 돌 덩거리 아저씨는 몇몇 동기들의 집으로 가을을 배달한다. 

 

배달된 대봉감은 이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직 딱딱한 설익은 붉은 가을이 집으로 도착한 지 한 달

단지 속에서 가을이 한 치 두 치 익어가더니

근육질 붉은 껍질이 부드러운 피부로 변했다

접시에 담아 속을 들여다보니

접힌 시간이 주름주름 잡힌다

친구가 한 여름을 애써 동기들의 입으로 보낸 가을이 보이고

손길 다듬은 정성이 달큰하게 씹힌다

겨울 입구에서 가을이 완성되었다 

 

겨울에도 농장의 시계는 멈추거나 더디게 가는 일은 없다. 퇴비를 만들고 봄을 준비한다. 어쩌다 연락 닿는 동기들은 아무런 특별한 약속도 없이 시간 이 나면 농장에 모인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겨울밤이 깊어 가고 그 밤은 타임머신이 되어 추억 서린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은 끊이질 않는다. 겨울밤에 별이 투신을 하면 돌 덩거리 농장에는 또 다른 겨울밤의 추억이 쌓인다. 

 

돌 덩거리 농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짧은 휴식이지만 즐거운 여운이 오래토록 맴돈다.

 

 

[김태식]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온마음재가센터 사회복지사(현)

울산신문 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해양문학상 논픽션 소설 당선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 wavekts@hanmail.net

 

작성 2024.11.19 11:40 수정 2024.11.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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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