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전라도 가시네

이순영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존재는 말을 통해 실존한다. 그러나 말의 절반은 지식 쓰레기다. 완벽한 은유로 존재를 설명해도 언어는 존재 안에서 사육당하거나 사멸하고 만다. 우리는 종종 욕인지 말인지 모를 언어를 들었을 때 뭔지 모를 정겨움이 가슴에 딱 안겨 올 때가 있다. 그 정겨움에는 그리움이 숨어 있고 그 그리움에는 깊은 애정이 숨어 있다. 강물처럼 주우욱 이어온 탯줄 같은 질김인지 소실된 언어의 끝에 매달린 토속의 향기인지 모를 한없는 아련함이 마음을 울렁이게 만든다. 그 언어가 바로 ‘가시네’다. 그냥 가니네가 아니라 ‘전라도 가시네’다.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네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리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이보다 더 정겨운 말이 있을까. 전라도 가시네라고 가만히 읊조리는 순간 모든 전라도 가시네들이 가만가만 올 것만 같다. 이용학이 ‘전라도 가시네’를 1939년 8월 ‘시학’에 처음 발표했을 때는 어둡고 어둡던 일제강점기였다. ‘북간도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네를 만나 기구한 운명을 서로 보듬으며 떠도는 자들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 ‘전라도 가시네’는 몇 달 전에 두만강을 건너 이곳 술막에 팔려 온 듯하다. ‘함경도 사내’도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북간도 술막까지 흘러와 외로운 이방인끼리 기대 그들의 운명을 위로했는지 모른다. 

 

‘전라도 가시네’는 해석 따위는 필요 없다. 그냥 나직이 읽어도 눈물이 난다. 고향 떠나 북방에서 떠돌며 유랑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이용악 시인의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전라도 가시네’는 전라도에 국한된 언어가 아니다. 팔도를 떠돌고 저 북방으로 떠도는 우리 민족 공동체를 통칭하는 토속적 언어다. 그 언어 안에 우리 존재가 살고 있다. 타향에서의 고향은 정신적 공간이다. 술막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고향이 되어주고 고향의 언어로 불러줌으로써 실존하게 된다.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네야’ 외치며 북방에서 문학으로 길어 올린 언어들을 풀어 놓았다. 전라도 가시네의 설움이 시 곳곳에서 소리 없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시인의 언어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의 집이다. 그 집에 사는 언어들은 시인의 영혼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온다. 소리 없이 사뿐히 다가와 가슴에 따뜻하게 머문다.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대학에서 공부하고 시인이 된 이용악은 식민지 시인의 암울함을 강한 의지로 극복하려는 작품을 창작했다. 이용악 시인은 말한다.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4.11.22 10:45 수정 2024.11.2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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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